[스포일러 있습니다]
많은 영화팬들이 사랑하는 영화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영화감독들을 위한 영화예요"
미국영화에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영화감독을 위한 영화였다면, 나는 한국에서는 "엠"을 영화감독을 위한 영화라고 확신할 수 있다.(VIP시사회에 참석한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들은 이 영화에 엄청난 찬사를 보냈다.) 예전에 "형사"의 영화평에 이런 말이 있었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예술이다. 스토리만으로 이끌어가는 영화도 훌륭하지만, 시각과 청각을 스토리로 대체하는 영화는 경이롭다. 그렇기 때문에, 형사는 위대한 영화이다."
그럼 맥락에서, "엠"은 영화가 꿈꾸는 모든 스킬과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한민우는 천재 소설가로 나온다. 그러나, 첫 소설이 대박이 난 이후로 두 번째 작품은 손도 데지 못하고 있다. 편집장은 그의 소설이 나오길 독촉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상태이다. 이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과 절묘하게 매치된다. 그리고, 민우가 꿈 속을 헤매면서 기억의 망각 상태에서 헤매거나 어떤 한 작품으로 인해 자신의 생활에 변화까지 오는 상황 역시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겪어 봤을만한 일이다. 비록, 이명세 감독은 한민우를 소설가 최인호 씨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라고 말했지만, 민우는 영화 감독의 거울이면서 동시에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명세 감독과도 닮은 캐릭터이다.
이명세 감독이 밝힌대로, 이 영화에서 줄거리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영화는 매우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감상한 바로도 이 영화는 스토리가 없다. 아니, 스토리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꿈"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가 꾸는 꿈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혹은, 우리가 간절히 기원하는 대상이 꿈에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꿈은 우리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가상으로 나마 이루게 해준다. 즉, 한 번 자고 나서 꾸는 꿈은 우리가 깨어나려고 해도 쉽게 깨어나지 못하고, 깨기 싫어도 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가 필름 끊기 듯 넘어가는 장면들은 대부분 꿈 장면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민우가 물폭탄을 맞는 장면이나 편집장과의 역할을 바꾸어 만나는 장면 등.)
이 영화에서 M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먼저, 영화의 두 주인공은 민우와 미미. 그리고, 민우는 M자형 앞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키워드인 미스테리, 멜로, 미스티, 뮤즈로도 해석된다. 또, 영화를 규정하는 단어인 Movie와 "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Music"도 M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는 둘러싸고 있는 Melancholy한 분위기. 그리고, 잃어버린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서 Miss로도 해석된다. 또, 프리츠 랑 감독의 유명한 유괴영화 "M"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붙였을 수도 있다.
(참고로, 이명세 감독은 M이 들어간 단어 중에, 미닝(Meaning)과 메시지를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는 결코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몇 분 전에 나왔던 화면이 되풀이되고, 꿈과 현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무슨 장면이 꿈이고 무슨 장면이 현실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 조금이라도 감응을 느낀 관객이라면 영화가 끝난 후에 오는 몽롱함을 체험할 수 있다.(필자의 얘기를 잠시하자면, 난 이 영화가 끝난 후에 극장을 나오면서 보이는 차의 불빛과 거리의 가로등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 보고나서 정리를 하기 힘든 작품이다. 원래 꿈에서 나온 것을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 하기도 전에 이 영화에서 나왔던 이미지나 이야기는 기억속에 사라진다. 마치, 민우가 미미의 기억을 필름 한 조각을 잃어버린 것 처럼. 그러나, 관객은 민우와 마찬가지로, 기억의 필름 한 조각에서 이 영화를 끄집어 내게 되면 이 영화에서 느끼게 되는 감동은 엄청나게 불어난다. 감독은 "관객도 혼란에 빠지길 원했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부분이 아닐까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바로 루팡바이다. 루팡바는 완벽하게 "꿈"속의 공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공간이다.(현실에서, 은혜가 루팡바에 전화를 하자 번호가 없다고 뜬다.) 그렇기 때문에, 미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과장된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하고, 전체적으로 검은 색 톤에서 은은한 블루 조명을 사용하면서 꿈 속의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높였다. 영화에서 민우가 미미와 직접적으로 조우하는 공간은 루팡바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역시 민우와 미미가 만나는 장면은 모두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루팡바 간판에 있는 루팡은 아마도 미미를 끌고 가려는 저승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미미는 저승사자에게 잡혀 루팡바에 오게 되고, 민우는 꿈 속에서 그 루팡바를 직접 찾아가 미미와의 기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한다.
"형사"를 규정지은 단어가 "영화액션"이라고 한다면, "엠"을 규정짓는 단어는 "빛나는 어둠"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서 빛과 어둠을 조율하는 감독의 능력은 경이롭다 못해 소름이 수십번도 넘게 돋았다. 영화의 90%이상을 세트에서 찍어서인지, 현란한 조명효과와 미장센은 압권이었다. 특히, 유리와 물은 흐릿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꿈과 현실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놓는 장치로 사용하였다.(영화의 초반에 민우의 사진 장면이나 물폭탄 장면, 초반에 커피숍 장면과 은혜의 모습을 풀샷-미디엄샷-비스트샷-클로즈업으로 잡은 빠른 와이프 장면등에서 물과 유리가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거울과 안경은 반사한다는 성질을 이용하여 "프레임 속의 프레임"이라는 영화의 표현 방식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명세 감독은 "청춘스타에겐 안경을 씌우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처음으로 깬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인 "나의사랑 나의신부"에서 최진실과 박중훈은 안경을 쓴다.) 나도, 거울을 볼 때마다 "과연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이 맞을까?"라는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되는데 이 영화도 그런 현실의 모호함을 표현하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또 돋보이는 것은 음향이다. 이명세 감독은 처음부터 이 영화를 "음향의 모험과도 같은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만큼 이 영화에서 음향이 가지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이 영화의 음향을 이해하기 위해, 잠깐 예시로 들 상황이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로 "불이야"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잠에서 깨어나, 황급히 집 밖으로 먼저 뛰쳐나갈 것이다. 불이 나든 나지 않았든, "불이야"라는 소리만 듣고 일단 그 상황을 판단한 것이다. "엠"에선 이런 음향의 효과들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음향인 "선풍기 대화"의 음향은 단연 압권이었다. 은혜의 아버지와 편집장의 대사가 나올 때 마다 이런 선풍기 대화가 극대화 되는데, 이 음향에 대해 이명세 감독은 "편집장의 목소리는 돼지울음처럼, 은혜의 아버지의 목소리는 속물처럼 들리게 하려고 했다."라고 밝혔는데 이 효과는 매우 효과적이였다고 본다. 그리고, 민우와 은혜가 각각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들의 근원을 찾는 장면에서도 음향을 매우 잘 사용했다. 이 장면에서, 물소리와 노래소리를 최고조로 틀어놓으며, 민우와 은혜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서, 그 음향을 빨리 제거하고 싶다고 느끼는데, 관객 역시 그 거슬리는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게끔 만든다. 이는, 이명세 감독의 "음향의 모험"의 실험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음향 뿐만 아니라 음악도 매우 좋았는데 미스테리하면서도 서정적인 음악을 동시에 번갈아 가며 사용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높였다. 특히,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안개"(영화의 엔딩에서 나오는 "안개"는 보아가 불렀다.)는 영화의 분위기와도 잘 맞을 뿐더러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이 된다.
또한,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다. 이명세 감독은 대체로 잘생기거나 예쁜 배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혜수, 최진실, 장동건, 강동원, 이연희, 공효진...) 배우의 외모가 뛰어나면 이미지적인 효과가 더 극대화 된다는 생각 때문인 듯 싶다. 어찌되었든, 이 영화에서 강동원은 강동원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도 안나는 연기를 해냈다. 감정 표현이나 대사 처리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영화의 분위기나 이미지에 강동원 이외에 다른 배우는 도저히 어울릴 거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걱정되었던 이연희의 연기도 훌륭했다. 첫사랑의 설레임과 수줍음을 매우 잘 표현했다고 본다. 그녀가 루팡바에서 눈알을 굴리는 장면에서, 이 배우가 어딜 봐서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영화의 촬영과 편집역시 압권이었다. 이명세 감독은 언제나 현란한 테크닉으로 영화의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이 영화에서 쓰인 "안개"효과는 "엠"을 실질적으로 정의한다. 몽롱하면서도 앞을 볼 수가 없는 안개. 이런 은은한 안개 효과를 완벽하게 보여준 촬영은 정말 최고였다. 그리고,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 매번 등장하는 정지화면과 사진같은 파노라마 영상. 그리고, 고속 촬영. 거기다 스텐실 기법 같은 편집 기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그 영화를 정의 할 수 있는 컬러가 있다는 것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것이다. 러브레터는 흰색. 붉은 수수밭은 주황색, 황후화는 금색, 란은 빨간 색 등을 주요 컬러로 사용하고 있는데, 한 색상을 정하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왠만한 영화적 재능이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엠은 대단하다. 엠은 "보라색"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여성복에서 보라색은 "요조숙녀"를 의미하는데, 이는 미미가 입고 있는 보라색 원피스와 어울리는 의미이다. 그리고, 보라색은 통상적으로 불안정, 불행, 죽음, 신비, 우아, 위엄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이 보라색의 의미를 뜻하는 장면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 긴 리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천재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시험하기 위한 영화를 하나씩은 만들고 싶어한다."라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말이 있다. 이명세 감독의 "엠"은 천재 예술가의 혼이 담긴 영화이다. 비록, 관객과의 소통은 단절 되었으나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만족 할 것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는 그 본분을 다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22세기형 감독에게 21세기는 과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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