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상황, 예상 가능한 유머.....
이 영화는 일본의 하기니와 사다아키 감독의 1991년 작품인 <노는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遊びの時間は終わらない)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장진 감독이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몇 년 동안 추진해왔으나 결국 자신의 손이 아닌 <박수칠 때 떠나라>의 조감독이었던 라희찬 감독에게 넘어가고, 장진 감독은 각본 및 제작에만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 홍보를 위한 TV 오락프로그램 출연도 라희찬 감독이 아닌 장진 감독이 전적으로 맡아 하고 있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장진 감독의 영화로 인식되어 지고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소위 '장진스러움'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듯 장진 영화의 느낌이 흐른다.
영화는 신임 경찰서장(손병호)의 신호 위반에 딱지를 떼는 정도만 순경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 장면 하나로 우리는 정도만 순경의 캐릭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원리원칙대로 모든 걸 하는 사람. 융통성이라는 걸 전혀 부릴 줄 모르는 사람. 알고 보니, 형사과였던 정 순경은 그런 성격으로 인해 교통과로 좌천된 전력이 있다. 한편, 관내에서 발생한 은행강도 사건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다독이고, 경찰 사기도 진작할 겸 신임 경찰서장은 미리 짜여져 있지 않은 모의 훈련을 계획하며 강도로 정도만 순경을 지목한다.
이 순간 정 순경은 혼잣말처럼 되뇌인다. "후회할 지도 모르는데..." 난 이 대사가 나오는 순간, 영화의 캐릭터 설정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고 느꼈으며, 이 때문인지 이후 영화에 대한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살다보면 조금의 융통성도 부리지 못하고 원칙대로만 하려는 사람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주위 사람들이 원칙대로 행동하지 않는 걸 비난할지언정 자신의 행동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정 순경은 자신의 행동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고 스스로 알고 있으며, 사전 경고까지 한다. 이런 캐릭터 부조화 대사는 다시 한 번 나오는데, 영화 중후반부에 인질극이 잠시 중단된 상황에서 정 순경은 이 서장에게 "지금이라도 명령하시면 상황을 종료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부당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 어쨌거나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이 두 대사는 나로 하여금 영화에 충분히 몰입하기 힘든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정 순경의 사전 경고대로 쉽게 끝나리라 예상되던, 아니 쉽게 끝나야 정상인 모의훈련은 정 순경의 철저한 사전 준비로 인해 경찰의 인질구출, 범인 검거는 실패를 거듭하며, 모의훈련 자체가 전국적 뉴스가 되는 등 일파만파로 확대된다. 이 때부터 영화는 마치 일종의 연극무대에서 펼쳐지는 마당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연극적이라는 느낌은 장진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 때문에 장진 감독에 대해 뛰어난 연극연출가인건 인정할 수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인질극이 시작되면서 하나의 상황이 발생하고, 진행되고, 정리되고, 또 하나의 상황이 발생하고, 진행되고, 정리되어 간다. 그런데, 계속되는 비슷한 상황의 반복과 이에 덧붙여서 나오는 동일한 패턴의 해결방식은 뻔히 예상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사실은 대부분 예고편이나 TV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이미 본 것들이다. 소개되지 않은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동일한 패턴이다보니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준이다.
스톡홀름 신드롬.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범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심리현상을 의미한다. 한국영화에서 스톡홀름 신드롬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 <홀리데이>가 아닌가 싶다. <바르게 살자>의 인질들이 정 순경에게 보여주는 호감과 지지를 과연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실제 강도사건도 아니고 모의훈련으로 실시되는 사건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정 순경에 대한 인질들의 우호적 반응은 이해되기 힘든 심리적 기제다. 갑자기 신의 은총이라도 내린 건가? 정 순경에게 소리치면서 대든 대가로 실신되고 강간까지 당한 여은행원의 반응이야말로 어쩌면 모의훈련에 말려든 일반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리라. 그런데, 이 은행원마저 강간 사건 이후로는 묵묵히 정 순경에게 우호적으로 변한다. 정말 일반적 경우라면 어땠을까? 처음엔 재미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지만, 이게 한 시간이 넘어가고 두 시간이 넘어간다고 하면, 거거에 무릎까지 꿇고 앉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안 해"하며 셔터문을 올리고 걸어나갈 것이다. 무슨 소리냐면 영화는 우선 상황만으로 긴장감을 주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은행강도사건이 아니라 모의훈련임을 출연한 배우들이나 보는 관객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 순경은 정말 사람잡을 짓을 서슴없이 한다. 투입된 경찰특공대를 잡기 위해 실제 공기를 차단하는데, 정 순경은 "1분만 더 했다면 실제 사망했을 겁니다"라며 자신을 변호하지만, 사람마다 폐활량의 차이는 커서 나같이 폐활량이 작은 사람은 무슨 사단이 나도 났었겠다 싶다. 반대로 이 정도까지 상황이 진행되면 경찰의 작전은 그 넓은 은행 유리창을 깨고 최류탄과 연막탄을 터트리며 진입해 들어가는 것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왜 저 유리창으로 진입해 들어가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혹시 방범창인가도 했는데, 그냥 평범한 유리창에 불과했다. 그런데 결국 그 넓은 유리창을 부수는 건 경찰이 아니라 정 순경이다.
더군다나 원칙대로 하는 정 순경은 마지막에 와서는 명백하게 반칙을 저지른다. 버스 운전할 인질이 없기 때문에 이미 사망한 형사가 버스를 운전하게 하는 것이다. 은행 현장에 남겨져야 할 사망한 인질들이 원칙을 깨고 왜 마지막 작전에 동원되었는지는 오로지 정 순경만이 알 일이다. 인질들이 마지막에 순순히 버스를 운전하며 경찰을 따돌리는 행위도 그다지 정서적으로 동감하기 힘들다. 도망가면서 신호를 지키는 인질들이라니.... 이걸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내내 스톡홀름 신드롬이 발생할만한 뚜렷한 계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무리가 아닌가 싶다. 아니면, 한 명의 인질을 사로잡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풀려난 인질들이 그 정도로 범인에게 협조한다고 믿기도 좀 어렵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무리수가 느껴지는 건 아마도 영화가 주어야 하는 주제의식에 대한 강박관념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제목도 <바르게 살자>라며 강요하는 어투로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영화가 정말 재미와 풍자를 주려고 했다면 마지막에 정말 강하게 뒤통수를 치기를 바랬다. 흔히 도덕적 경구를 늘어 놓는 사람치고 실제로 도덕적인 사람은 별로 없듯이. <바르게 살자>라고 강요하던 정 순경이 모의 훈련을 빙자해 철저한 준비로 거액의 예금을 빼돌리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든지, 점점 가중되는 스트레스로 인해 아주 비열하게 변한다든지 하는 식의 전개는 어땠을까. 교훈을 강요하는 결말보다는 오히려 풍자의 크기가 커지지 않았을까.
이 영화에서 제일 웃었던 장면. 주진모가 분한 지점장이 은행직원인 이영은에게 한 대사. "너는 예금을 왜 다른 은행에 하니? 너가 하는 짓이 완전 강도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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