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속에서도 심지어 심도있게 다루어 본적 없는 소재 '궁녀',
궁궐에 들어올때부터 왕의 여자들로서 운명이 정해진 여인들이자
왕과 왕비를 보필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삶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던 그들을 다루었다고 하는 김미정 감독의 영화로서 기대감에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수 없겠다. 여류감독의 섬세하고
좀더 디테일한 감정묘사로 궁녀들의 드러나지 않은 '음지' 의 삶을
보여줄것이라는 기대감을 접을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궁녀>의 삶을 조명하고자
가상의 인물들과 스토리가 틀이된 영화 속 궁녀의 첫 출발은
나름대로 나의 기대감에 부흥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스테리함
가득한 굉장히 음습한 공간감이 화려한 궁궐의 배경과 맞물렸고
하나의 사건을 매개체로 하여 궁녀를 심도있게 조명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느꼈기에 몰입할수 있었다. 궁녀 출신의 정조의 후궁으로
원자책봉이 되기만을 마음 졸이는 후궁 희빈(윤세아)을 모시는
월령(서영희)이 목을 맨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방을
쓰던 궁녀 옥진(임정은)과 사건현장을 발견해서 목을 멘 것을
최초로 목격하고 그런 월령의 노리개를 훔친 궁녀 정렬(전혜진)
이 일을 씨끄럽게 만들지 않고 분란을 마무리 하려는 감살상궁
(김성령)에게 붙들려 간다. 내의녀인 천령(박진희)은 사건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 자신의 판단을 확실하고 감찰상궁에게
말하지만 그녀의 말을 묵살당하고, 천령은 조용히 자신의 나름
대로 수사를 해나간다. 천령은 마치 광기에 사로 잡힌듯 억울
하게 죽은 궁녀라 하고 다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듯이 말하지만 그는 월령이 출산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 일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도 과거에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입장에서 자신이 살아가기위해 죽일수
밖에 없었던 핏덩이를 떠올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천령의
집착은 이해할수 있다. 그리고 '18세' 라는 관람등급이 의미하듯
궁녀에게 가해진 잔인한 형벌이 그대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 것은 쥐부리글려와 함께 궁녀에 대해 생각해 볼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 되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녀를
조명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왕의 후궁인
희빈과 희빈을 모시는 심상궁(김미경)으로 방향을 바꾸어 궁녀의
음지생활에 대한 모습보다는 궁녀가 유일하게 출세할수 있는
길, 왕의 여자로서 권위를 가지게 되는 야욕에 불타는 희빈으로
흘러간다. 옥진이 정랑인 이형익(김남진)에게 집착하는 모습과
같은 과거를 가진 천령의 모습을 엮는 것은 좋은 시도였다고
보지만 결정적으로 사건의 중심과는 빗나간 궤적으로 나중에
옥진의 에피소드가 굳이 필요했나하는 의문이 든다. 열병을
앓고 벙어리가 된 옥진을 괴롭히는 다른 궁녀들과 다르게 유일
하게 정을 준 사람이 이형익이었다고 설명해 주는 듯한 짧은
신이 있지만 그것 가지과 인과관계를 만들기 힘들었다. 궁녀가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버려지는 존재였다는 이야기
를 펼치고자 했다면 좀 더 그 끈을 느낄만한 강렬한 아이템이
필요했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이미 월령이라는 궁녀의 자살이
라는 소재가 영화를 한쪽으로 몰고 가버린다. 음지에서의 궁녀의
생활을 조명하고자 했다면 미스테리적인 장르에서 호러로 넘어가는
선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또한 어쩔수 없을듯 하다.
월령의 귀신이 등장함으로써 사극 미스테리 영화였던 '궁녀' 는
어느새 '전설의 고향' 이 되어 버렸다.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권력을 취하는 희빈, 그리고 그런 희빈의 사람으로서 궁녀의
규율대로 "눈감고 귀막고 입다물라.무덤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보고도 못본척, 들어도 못들은척, 알아도 모르는척 해야한다"
며 궁녀의 법도와 같은 이야기를 실행하는 천령의 모습은 솔직히
억지스러운 면이 눈에 들어왔다. 월령의 혼이 씌어버린 희빈의
모습속에 궁녀로서의 야욕이 불타는 모습이 돋보인다. 그것은
원자책봉이 되도록 일을 꾸민 심상궁을 비롯해 궁녀들 사이에서
그러한 야심가들도 있을 것이라는 조명으로 해석이 되지만 결국
그것은 월령의 혼의 도움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즉, 월령의 자살이 없었으면 대비의
죽음과 원자책봉이 없었을 것이고 야심가적인 궁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결국 이
한가지를 위해 궁녀들의 실질적인 삶의 다른 면모들을 비롯해서
장르적인 추가가 이루어지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영화 개봉 전 시사회에서 '궁녀' 를 공포
라는 장르적 뉘앙스가 풍길줄 몰랐던 관객중 한명이 기절했다
는 소식이 입증하듯 관객들은 대부분 궁녀를 이런 공포영화의
방향으로 이끌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도 솔직히
영화가 이런 방향과 결말을 향해 뛰어갈 줄은 알지 못했기에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무언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야기해줄
것처럼 긴장감을 고조시키지만 그 비밀스럽고 신비한 욕망이
응축된 공간을 제대로 풀어내기에는 중심의 축이되는 사건이
너무 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료가 거의 없다고 하는 '궁녀'
들의 삶에 대해 여러가지 측면을 맛보기나마 제시하려고 했던
감독의 의도를 솔직히 볼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신선하면서 무난하게
볼만한 영화는 되지 않았나 하는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