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몽키즈라는 영화를 보며 정말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세상 자체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선 말이 통하지 않는 그 어떤 것들도 무참히 살해하며 연구 대상으로 삼고, 혹은 개인의 명분이나 어느 특정한 집단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 동족을 무참히 살해하는 비극적인 결말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인류가 가장 높은 곳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의 좁은 심적 공간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범인은 12몽키즈가 아니다. 나는 그점과, 이 영화의 제목이 12몽키즈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것이 내포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몽키즈는 결과적으로 단순히 동물애호가들이 만든 혁명주의적인 색채를 띈 단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12몽키즈 자체라고 생각한다.
12몽키즈의 대장이라 불리우는 자는 극중 1990년 정신병원에 갇혀있다. 이점에서 미루어 볼 때, 브래드 피트가 정신병원에서 느낀 것과 배운 것은 단순히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닌 억압되고 자유와 사랑이 결핍된 제한된 공간 속에서 많은 동물들이 무참히 연구대상으로 쓰이는 것을 보며 인간다운 "정신병" 을 얻은 것이다. 여기서 인간다운 정신병이란 그 시대와 사회가 이해하지 않는 것, 과학과 형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어쩌면 원시적인 감성일지도 모른다.
한편 브루스 윌리스(제임스)는 미래에서 범죄자로 나온다. 그가 범죄자로 나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엉뚱한 망상을 통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에 많이 어긋날지도 모르겠지만 나만의 생각은 자유라는 전제하에 글을 써 보려 노력하고 있다. 현실은 미래를 창조하지만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이미 초래된 미래를 바꾸려 하는 것이 인간의 부끄러운 본능이라면, 현실은 그 어떤 자들의 희망과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게 현실의 냉정한 본능이다.
이기적인 과학자들.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범죄자를 죽이는것이 아닌 12몽키즈가 두번다시 탄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12몽키즈가 활동하며, 종말론자가 범죄자로 나타나 세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인류가 멸망할 1996년 당시 제임스는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인격체의 눈에서 미래의 자신이 죽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것이 영화상으론 단지 비현실적인 면모를 그린 것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어린 모습의 제임스는 순수한 인격적인 정신에서 파멸될 자신, 혹은 사회의 자화상을 여실히 본게 아닌가 싶다. 나만의 망상일까.
세상은 과학자들이 멸망시켰다. 인류의 실질적인 진보를 외치며 수많은 살인기계와 자연에 어긋나는 비인간적인 실존을 탐구한 과학은 이미 우리들이 선택의 극단이 되어 버렸다. 인간적 너무나 인간적인 감성과 이성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인위적인 과학에 의해 현실을 결정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과학으로 말미암은 극단적 해결은 수많은 전쟁과 비극적인 참사를 초래했으며, 그 결과 고인스같은 미친 종말론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지하에 사는 과학자들은 여전히 어릴적에 인류의 멸망을 지켜보며 정신적으로 타락한 이의 죄를 따지며 과거로 내몬다. 하지만 제임스가 죄를 지어야만 했던 까닭은 과학자 자신들의 이기적인 명분으로 , 혹은 이 사회를 이해한 모든 이들의 명분으로 만들어낸 비극적인 현실이 주측이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제임스의 죄는 지배자들이 꾸며낸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인류를 지상으로 회복시킬 해독제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더이상 억압된 동물을 동정하며 과학자들을 동물의 우리 속에 가둬야했던 인간적인 정신병자들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그저 자연의, 차라리 칠흑같은 카오스가 더 낫다 생각했던 때가 낫다 생각하지 않도록 형성된 인간적인 세상이 만들어질 때. 12몽키즈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며
바이러스 따위를 걱정하며 인간이 자신이 만든 산물에 자신이 멸망하는 어리석은 꼴이 더 이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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