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정체 모를 안개가 호숫가에서 피어난다. 전기가 끊기고 통신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급해진 사람들은 생필품이라도 사기 위해 동네의 대형 마트로 몰려든다. 어린 아들 빌리(나단 갬블)와 옆집 주민 노튼(안드레 브라우퍼)을 데리고 그곳에 온 주인공 데이빗(토머스 제인)도 그중 한 사람. 그때 갑자기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공포에 질려 상점 안으로 뛰어들어와 안개 속에 무엇인가 있다며 소리친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상점 바깥으로 벗어나면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도대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사람들이 막연히 두려움에 떨 때쯤 온갖 기형적인 괴물들이 나타나고 희생자는 속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모디(마샤 게이 하든)라는 광신도가 종말의 계시가 온 것이라며 사람들을 선동한다. 사람들은 카모디 부인의 말에 홀려 점점 흉악한 광란자가 되어간다.
영화 <미스트>는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등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의 영화화로 재능을 인정받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평소 가장 자신있는 일이 '스티븐 킹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라고 호언해 왔던 만큼 나에게 있어선 기본적인 기대치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영화였다. 실제 mist는 fog에 비해 엷은 안개를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바로 눈앞도 안 보일 정도의 짙은 안개가 마을을 감싸는데, 왠지 mist가 fog에 비해 어감적으로 호러 장르에 적합하다고 느껴지는 건 영화를 이미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영화는 거의 반이 지나가도록 괴물의 모습이라고는 거대한 촉수를 제외하고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안개 속으로 사라진 사람이 비명을 지르거나 줄을 묶고 걸어간 사람의 하반신만 돌아오는 설정 등으로 뭔가 무서운 게 있다는 전조를 되풀이한다. 그런데, 그런 전조만으로도 영화는 화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긴장감 넘치고 짜임새도 높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맞서 다양한 대응 방식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종갈등, 계급갈등, 종교갈등 등 각종 대립들이 표출된다.
처음에 이 영화의 악역처럼 느껴지는 흑인 변호사는 평소 마을 주민들이 외지인이며 흑인인 자신에게 차별대우를 했다며 분개한다. 그는 이 소동이 자신을 괴롭히려는 마을 주민들의 짜고 친 장난이라고 여기며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물론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기가 깊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선 점점 야만성이 증가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주제가 '문명을 한꺼풀만 벗기면 야만이 드러난다'고 읽었는데, 냉철하고 예리한 학교 선생님은 인간에게 그런 야만성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사람들의 분노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외부의 괴물이 아니라 내부의 사람들에게 돌려진다.
영화는 절반을 넘기며 드디어 괴물들의 실체를 보여준다. 마트 창문에 날아와 붙는 이상한 거대 곤충들. 그리고 이 곤충들을 잡아먹는 더욱 거대한 괴물들이 유리창을 깨고 마트 안으로 날아 들어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불과 총으로 겨우 사태를 진정시키지만 점점 광신도의 계시에 정신을 뺏기기 시작하고, 제물로 받쳐질 것을 찾는다. 이 때 데이빗을 중심으로 일부 주민은 약을 구하러 갔다가 거대한 괴물 거미와 사투를 벌이는데, 그곳에서 헌병으로부터 이번 사건의 단서를 듣게 되고, 이상한 괴물들의 출현은 군이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급기야 광신도들은 마트 안에 있던 군인을 제물로 삼아 괴물에게 바친다. 이제 광신도들은 서서히 데이빗과 그 아들, 그리고 여교사 등을 표적 삼아 포위해 온다. 안에 있어도 죽게 되고, 밖으로 나가도 죽게 되는 상황을 맞은 데이빗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광신도들을 피해 목숨을 걸고 밖으로 도망가, 차에 탑승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찾아 떠난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높은 긴장감이 요구되는 영화다. 전반부에선 무엇인지 모를 안개속 괴물들(공포들)에 맞서서, 그리고 그 공포가 현실화된 후반부에선 사람들 사이에 극한으로 치닫는 대립에 맞서야 한다. 특히 광신도들의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괴물들이 있는 외부보다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공포가 피어나게 되고 긴장감은 더욱 높아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밖으로 도망치는 데이빗의 행동에 수긍하도록 길들여지게 된다. 물론 광신도인척 안에 그냥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은 이미 광신도로부터 증오의 대상으로 찍힌 터라 목숨이 담보잡혀 있는 상황인 것이다.
데이빗이 도망쳐 나온 안개 속은 한 폭의 지옥도다. 거대한 괴물들이 지나다니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데이빗에게나 보는 관객에게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데이빗과 일행들은 괴물이 다가오는 굉음이 가까워지자 모든 걸 포기한다.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이 영화의 반전은 한 마디로 정신적 공황을 불러 일으킨다. 누구는 이 반전을 코미디라 할지도 모르고 허무하다 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런 반전은 할리우드가 제시할만한 수준의 반전은 아니다.
정신적 공황은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데이빗과 관객이 공유하는 것이다. 정신적 공황을 불러올 만큼 그 반전은 암울하며 극한적이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이 영화의 마지막처럼 암울한 결론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영화 <큐브>의 결론은 매우 잔인하다. 왜냐하면 큐브를 빠져나간 다음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잔인함을 넘어서 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10년이 지나도 결론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라고 느껴진다. 황진미 평론가는 영화의 결론에 대해 <나는 전설이다>가 종말론을 전제로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 반면, <미스트>는 기독교의 위안마저 버린다고 썼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기독교적 위안마저 버린다는 건 용감했다고 할 수 있지만, 분명 대중적인 접근은 아니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약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끔찍하다. 만약 절망과 고난을 뚫고 나가기 위해 분투를 계속하다가 결국 모든 걸 포기했는데, 바로 그 지점이 절망과 고난이 끝나는 지점이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그 지점을 알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