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이 찾아낸 배우 '하정우'와 2007년이 찾아낸 배우 '김윤석'
내가 좋아하는 배우 둘이 뭉쳤다. 김윤석과 하정우. 이 두 배우 중 한명의 이름만 들어도 끌릴판에 둘의 이름이 동시에 나온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시놉시스와는 다른 시놉시스를 보인다. 살인마를 쫓는 출장안마 포주라... 선악의 대결이 아니고 악과 악의 대결이다. 그리고 제목이나 예고편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대규모 액션에 카체이싱은 기본이고 긴박감 넘치는 추격씬이 넘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둘의 연기가 가장 기대됐었다. <타짜>, <즐거운 인생>, <천하장사 마돈나> 등에서 뇌하수체에 팍 꽂히는 연기를 보여준 '김윤석'과 출연영화는 <용서받지 못한자> 유일하게 한편 봤지만 그 한편으로 꽂히기엔 충분한 연기를 보여준 '하정우'.
이것만 봐도 기대할만 하지 않은가.
출장안마 포주 전직형사 '엄중호'(김윤석). 최근 일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여자들이 생기자 도망가거나 팔려간 것으로 생각하고 그녀들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려 찾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의 마지막 손님의 번호가 같은것을 발견하지만, 미진(서영희)이 그 손님에게 가서는 연락이 없다. 그 손님을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지영민'(하정우)의 옷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그가 범인임을 직감한다. 필사의 추격끝에 붙잡힌 영민. 그가 여자들을 팔아 넘겼다는 중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경찰. 갑자기 영민이 입을뗀다. "안팔았어요. 죽였어요."
예전에 단편영화제에서 <완벽한 도미요리>라는 단편영화를 본적이 있다. 상당히 하드고어한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재치있고 코믹한면이 있으며, 약간은 기괴한 영화였다. 상당히 기발하며 인상깊은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영화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바로 <추격자>이다.(이걸 영화보기 직전에 알았다.) 과연 그때의 그 신선한 충격만큼의 영화가 나왔을 것인가. 답부터 말하면 '나오고도 남았다.'이다. 최고다!
사실 그간 단편영화로 주목을 받았던 감독 중 장편영화로 들어오면서 좋은 평을 받은 감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단편영화 감독들도 장편에서는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짧게만 호흡하던 사람이 긴호흡을 필요로하는 장편에서는 숨이 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편과 장편은 많이 다르다. 어떻게 보면 다른 장르로 볼 수 있다. 그러니 단편에서 뼈가 굵은 감독들이 장편영화 데뷔작의 성과가 시원치 않은게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나홍진'감독은 각본까지 직접 쓰면서 장편에 화려하게 데뷔했다.(아직 개봉전이라 성과가 나오지 않아서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의 연출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박하다. 쉴틈이 없다. 영화를 보지만 영화라 생각을 못하고 그 영화속에 내가 녹아들게 한다. 마치 내가 '지영민'을 쫓는 듯하다. 이점만 보더라도 영화를 충분히 즐길만 하지 않겠는가.
<추격자>는 다른 범죄영화와는 다른 대결 구도가 이뤄진다. 보통 '정의'(Justice)로 대표되는 경찰과 '악'으로 대표되는 범인의 대결 구도가 범죄 영화의 관행이라면 <추격자>는 이 관행을 깬다. 경찰과 범인의 대결이 깨졌다기 보다는 '정의'의 대표가 없다. 자신에게 돈 빌린 여자들을 팔아넘(겼다고 믿는)긴 자를 잡아 여자들을 찾아내 돈을 받아내려하는 엄중호가 '정의'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연쇄 살인마 지영민이 '정의'일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고. 결국 '악'과 '악'의 대결구도가 이뤄지게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기에서 오는 딜레마는 없다. 대부분 엄중호를 응원하던지 아니면 중립적으로 영화를 지켜보게된다. 아니면 간혹 지영민을 응원하면서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엄중호는 전직형사라는 '정의'에 대표되는 쪽에 있었지만 '악'으로 변모된 인물이다. 그런면에서 '정의'쪽으로 갈 수 있겠지만 '정의'의 수호신 경찰은 그의 편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잡으려 하기도 한다. '정의'쪽으로 넣어주려고 했던 인물이 '악'보다 더 궁지에 몰린다. 이렇게 영화는 절대 '선'이 없다. '정의'도 없다. '악'(惡)과 '악'(깡)만이 가득차 있다. 지독하다.
<추격자>는 <살인의 추억>과 여러부분 닮아있다. 우선 실제 연쇄살인을 다뤘다는 점이다. 그간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실화가 아닌 100% 허구로, 과연 실제로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악랄한 인간들을 다뤘지만, <추격자>는 '유영철 연쇄 살인 사건'을 <살인의 추억>은 '화성 살인 사건'을 다뤘다는 점이 닮아있다. 감독 실제 <살인의 추억>을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엄중호가 지영민을 쫓는 추격씬에서 북소리로 된 음악이 나오는데 이는 살인의 추억에서도 연출이어서 마치 오마주로 보이기도 하다. 골목 추격씬도 그렇고. 수사방법이나, 범인으로 추정되는(혹은 범인인) 인물의 침착함도 닮아있다.
하지만!
<추격자>를 <살인의 추억> 아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절대 오산이다. 그것은 두 영화의 가장 다른 점인 바로 '범인'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은 범인을 긴가민가하게 나타내지만, <추격자>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이 점은 영화를 보는 감정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살인의 추억>은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 저 박현규(박해일)가 과연 범인인가'라는 마음으로 보지만 <추격자>는 '과연 어떻게 지영민이 범인인 것이 밝혀질까. 그 증거를 어떻게 찾아낼까'라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이 두 마음이 두 영화를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영화를 풀어가는 내용도 다르게 만든다.
연쇄살인 영화답게 피가 많이 넘쳐난다. 그리고 잔인한 장면도 더러있다. 사람 머리에 정을 대고 망치로 내려친다던지, 풀스윙 망치에 머리가 깨진다든지 범인의 잔학무도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범행시에 그의 무표정과 전혀 일그러짐 없는 표정은 범인의 싸이코패스적 면모를 보여준다. 실제 '유영철'이라는 연쇄 살인범을 모델로 했음이 그대로 나타난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고도 감정의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했다.(유영철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영화내내 뛰고, 쫓고, 쫓기고, 사람 죽고, 피흘리고 하지만 중간중간 웃음 소스를 넣어서 숨을 돌릴 수 있게한다. 이 웃음들은 영화에 전혀 누를 끼지치 않게 요소요소에 포진되어 있다. 다소 무거운 영화라 이 웃음 코드를 잘 못 연결하게 되면 분위기 망가뜨리기 쉽상인데 정말 타이밍 좋게 웃음 코드를 연결해 냈다. 조여줄때 조여주고 풀어줄때 풀어주는 완급조절이 적절하게 됐다. 장편데뷔작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완급조절과 호흡조절이 상당하다. 거기에 관객의 예상을 완전 빗나가게 하는 내용도 과감하게 더해져 더욱더 내용을 긴박하게 만드는 용한 재주도 겸비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역시나 배우들의 연기였다.
'김윤석'을 처음본건 마봉춘 아침드라마 <있을때 잘해>였다. 그 드라마에서 엄마의 치마폭에 싸여서 휘둘리는 철없는 중년 아들역을 했던 김윤석을 봤을때 '연기 별로네...'라고 생각했으나 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으니... <타짜>의 아귀를 보는 순간 그 마음은 저멀리 천왕성으로 보내버렸다. '정마담'(김혜수)만큼이나(혹은 보다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냅다 꽂혔다. 그뒤로 본 <천하장사 마돈나>나 <즐거운 인생>에서도 역시 김윤석이었다. <추격자>에서 엄중호라는 캐릭터는 막무가내에 다소 폭력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이다. 김윤석은 그런 엄중호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가장 좋았던건 단연 '욕빨'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의 욕은 가을 단풍 만큼이나 자연스럽다. 그만큼 그의 대사처리에 1%의 어색함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의 행동역시 마찬가지.
김윤석과 대결하는 지영민역의 하정우.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면서 신인이 연기 정말 자연스럽게 잘한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듯 보이지만 실제 그의 생활인듯함이 묻어나는 연기가 상당히 인상깊었다. 그뒤로 종종 잠깐잠깐 그의 연기를 보았지만 길게 본적이 없었다가 오랫만에 그의 연기를 만끽했다. 무표정의 살인마 '지영민'역을 맡은 그는 때로는 정말 평범한 청년 같아보이지만 범행시에는 무섭게 돌변해 버리는 극악무도 살인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윤석에 뒤지지 않는 그의 연기다.
정말 오랫만에 연기, 연출, 내용 3박자가 제대로 맞는 별 5개짜리 영화였다. 영화관 가던 버스에서 계속 졸려서 영화보다가 졸면 어쩌나 했는데 상영시간동안 1초도 안빼고 집중해서 봤다. 이게 얼마만에 거침없이 2 Thumbs Up인가! <로만 폴린스키의 피아니스트>이후로 처음인듯하다. 이 영화가 흥행이 안된다면 정말 아쉬울 것같다. 추천많이 해야겠다. 2월 14일 개봉이니 모두 기대하시도록!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이어 올해 초부터 대박 작품이 터진다. 과연 올해는 어떤 또 다른 영화가 나올지 기대된다. 사실 작년에도 기대작은 많았지만 크게 만족시켜준 영화는 없었다. 아직 안봤지만 얼마전 개봉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도 별로 말이 좋지 않고, 신하균의 출연으로 기대했던 <더 게임>도 기대이하였다. <클로버 필드>를 제외한 외국 영화들도 기대에 못미쳤다. 올해 영화들은 작년보다 재밌기를 바란다.
P.S 영화의 배경인 망원동. 땅값 떨어지려나... 특히 망원동 24-1은 집값이... 하긴 실제 주소를 쓰진 않았겠지...
P.S 2. 요즘 영화 보면 전화번호를 풀로 다 보여주는 장면이 많은데 과연 그리로 전화걸면 누가 받을까... 영화 홍보음성만 나오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