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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에 상처를 주려거든. 추격자
hepar 2008-02-28 오전 1:34:19 1825   [11]

그가 서있다.

나는 포박당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반쯤 풀린 눈으로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에선 한줌의 감정조차 읽을 수가 없다.

그가 다가온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난 그가 웃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다.

 

그의 손엔 큼지막한 망치와 끝이 무딘 정(돌을 쪼는 못 같이 생긴 도구)이 들려 있다.

정을 든 그의 왼손은 나의 관자놀이를 향해 있다.

잠시 뜸들이던 그는 망치를 든 오른손을 치켜올린다.

 

꽝.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화장실에서 연쇄살인범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물론 조금 각색을 했다) 영화가 비로소 제 색깔을 내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면을 보다 흠칫 놀랐다. 길고 굵은 쇳덩어리가 그녀의 머리를 조준했을 때, 아주 오래 전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싸움이란 걸 거의 하지 않았다. 물론 피치 못해(?) 몇 번 주먹다짐을 한 적은 있다. 초등학교 때였을 거다. 그 나이에 고만고만한 싸움실력을 가진 녀석들이 붙을 땐 대개 서로 헛주먹질만 한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맞은 한 방에 싸움이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체구나 실력 차이가 클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주먹은 작은 녀석의 얼굴이며 배며 가슴팍에 정확하게 꽂혀 들어간다. 누운 채로 상위를 허락하게 되면 그걸로 끝이다.

 

나도 그런 식으로 맞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녀석은 내가 몸을 비틀어 넘어뜨리기엔 너무 무거웠고 나를 깔고 앉은 채로 주먹을 겨누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두 팔은 이미 녀석의 두 다리에 붙들린 채였다. 그때 느낌은 뭐랄까. 두려움을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공포랄까. 주먹을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거기서 결코 체념 따위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 짧은 순간에도 맞은 뒤의 고통과 저림 따위를 상상하게 되고 그게 몇 번이고 재생된다. 끝났구나 싶은 절망감이 듦과 동시에 고통의 세세한 느낌들까지 미리 체험하게 된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때 느끼는 공포는 이미 가지고 있던 두려움마저 압도해 버린다.

 

그런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잠시의 고통의 아니라 죽음이라면 어떨까. 그녀의 머리 위에 놓인 쇠못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저게 죽음 직전의 두려움이란 것이겠구나.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압도적인 공포라는 게.

 

목욕탕에서의 이 씬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군데군데 녹이 내려 검게 더럽혀진 하얀 타일. 건조하고 창백한 백열등 불빛. 살인도구들이 내는 기분 나쁜 쇳소리. 살인마의 히죽거리는 표정. 바둥거리면서도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여자. 그 섬뜩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감독의 연출력에 또 한 번 떨었다. 끔직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와우! 브라보!

 

그런데 얼마 전 먼저 본 친구가 이런 평가를 했다. "살인의 추억이랑 비교가 되더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낫 배드!"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평가도 그 정도겠다 싶었다. 김윤석과 하정우의 연기가 송강호와 박해일에 뒤졌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망치와 끝이 무딘 정처럼 영화도, 그들의 연기도 조금은 무딘 느낌이 들었다. <살인의 추억>이 당시 경찰들의 아마추어리즘을 비웃으면서도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집착을 강렬하게 표현해냈다면, <추격자>는 비슷한 설정을 가져가고 있음에도 표적이 불분명해서 강렬한 인상은 주지 못했다. 찌질스런 정치인도 등장하고 무능력한 경찰과 규정 따위에나 얽매여 있는 비겁한 검사도 등장하지만, 여러가지 상황들을 복잡하게 엮은 탓에 억세게 운 좋은 범인과 억세게 운 나쁜 희생자들만 선명하게 대비될 뿐이다. 김윤석의 눈빛에서 송강호가 던졌던 마지막씬의 강렬한 눈빛과 같은 무게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게다가 피와 폭력이 흥건하다 못해 과잉이 아닐까 싶을 정도여서 전체적으로 혼돈과 아비규환의 느낌이 강했고 상대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의 섬뜩한 이미지는 많이 가려졌다. 왜 하필 망치와 정이었느냐에 대한 설명도 부족한 듯 싶고, 연쇄살인범의 치밀함에 대한 묘사도 좀 모자라지 않았나 싶다. 애초에 범인을 밝히고 추격자와의 대결구도를 펼쳐놓으려 했다면 이 둘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대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결코 나쁘지는 않았던 영화다. 내 옆에 앉은 여학생은 영화 내내 눈을 가리고도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했고 뒤에 앉은 한 남자는 애가 탔는지 계속 '어후, 어후'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만큼 관객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지루해서 졸릴 지경인 스릴러가 널리고 널린 마당에 신인감독의 장편 데뷔작치곤 대단한 물건이 나온 셈이다. 나 또한 무척이나 가슴 졸이며 봤고 그가 보여준 살풍경에 치를 떨기도 했다.

 

다만 그 잔인한 장면들에 내 영혼이 깊이 상처받았음에도 그에 걸맞은 보상을 못 받은 기분이랄까. 조금만 더 시원했으면 조금만 더 분발해주었면 하는 아쉬움? 뭐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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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쿤요   
2010-03-1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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