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내가 가슴이 뛰고 온몸이 쑤신다.....
스릴러 장르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영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최고의 스릴러 장르 영화라고 칭송받는 이유도 바로 탄탄한 과정에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왜 그 동안 한국 스릴러 영화들이 대중들의 외면과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반전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반전으로 가는 과정 자체를 소홀히 다뤘다는 점이다.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추격자>는 한마디로 잘 만들어진 웰 메이드 스릴러 영화다. 반전에 대한 부담감 없이, 이야기를 옆으로 흐트러뜨리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리는 속이 꽉 찬 영화다.
<추격자>는 처음부터 모든 걸 공개해 놓고 시작한다. 출장 안마사인 미진(서영희)이 감금당하는 과정, 지영민(하정우)의 연쇄 살인 행각을 꼼꼼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는 지영민을 검거하는 얘기인가? 그것도 아니다. 이미 영화 초반에 지영민은 검거되고, 선선히 자신의 살인 행각을 털어 놓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끝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들며, 보는 관객을 몰입시킨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인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면에서 만약 당신이 슈퍼 여주인의 행동에, 그리고 지영민을 감시하는 여 형사의 행동에 갑갑함을 느끼고 분통을 터뜨렸다면 그건 이미 충분히 영화에 몰입되어 있다는 얘기다.
엄중호(김윤석)라는 악덕 보도방 업주가 있다. 자세히 소개된 건 아니지만, 그는 부패행각이 발각되어 잘린 전직 경찰 출신이다. 아마도 보도방을 하면서 경찰들과 미리 단속 정보도 주고받는 사이일 것이다. 미진의 핸드폰엔 엄중호라는 이름대신 '쓰레기'로 적혀 있을 만큼 그는 정말 쓰레기다. 폭행당하는 아가씨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하지만, 그건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한 보호일 뿐이지, 애당초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없는 놈이다. 누구를 만나든 돈부터 뜯어낼 생각인 그는 핸드폰 뒷 번호가 4885인 놈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자들을 팔아넘긴다고 생각하고, 그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4885를 잡기 위해 미끼로 쓴 미진마저 납치되고, 우연한 교통사고로 옷에 피가 묻어있는 지영민을 만나 직감적으로 그가 4885임을 눈치 챈 엄중호는 지영민을 쫓기 시작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망원동 좁은 골목길에서의 추격신은 아마 <추격자>의 이미지를 가장 대표하는 장면일 것이다. 원래는 NG였다는 지영민의 넘어지는 장면을 포함해서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추격신은 보는 내가 숨이 가빠지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실제 이런 식의 추격 영화에서 거의 표현하지 않은 김유석의 헛구역질 장면은 이 영화가 얼마나 실제(리얼)를 추구했는지를 입증하는 명장면이다.
<추격자>는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연쇄살인범 앞에서 관할 다툼만을 벌이고, 엄중호의 폭력을 일부러 방관하고선 문제가 생기자 엄중호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는 비겁한 경찰들, 검경 갈등으로 지영민을 풀어주는 수사기관, 기자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서울시장,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출장 안마사들의 실종,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인 교회의 십자가 등등등. 영화를 보다 제일 웃었던 장면 중 하나가 서울시장에게 인분을 퍼부은 뒤 잡혀가는 시민이 "하수도 고장 났다고 했더니 상수도를 고쳐주고 지랄이야"했던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현재는 대통령이 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떠올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보통 정치인에 대한 풍자는 그저 일반적인 국회의원 정도로 그치는데 굳이 서울시장을 출연시켰다는 자체가 분명한 목적을 띄고 있다고 보였다.
그리고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선가 밝혔듯이 이 영화엔 교회,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단순하게 보자면, 지영민은 한 때 석재상에서 일을 했고, 교회에 십자가를 조각해 납품한 전력이 있다는 정도의 얘기에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몇 번에 걸쳐 강조되는 교회의 십자가는 온 천하를 비출 수 있다는 십자가가 알고 보니, 바로 발밑의 어둠조차 감싸 안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풍자이며, 비대화되고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풍자이다.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출연 배우들의 열연이다. <타짜>, <천하장사 마돈나> 등의 작품으로 이미 연기 하나만큼은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김윤석은 첫 주연을 맡은 <추격자>에서 마치 날개를 단 것 같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생동물을 보는 듯한 그의 연기는 감탄이 절로 난다. 지독한 인간쓰레기에서 하룻밤 동안의 추격을 통해 점점,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듯한 연기는 실로 절묘하다. 그리고 하정우.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대사 하나, 제스처 하나가 마치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오르는 벌레의 느낌이고, 정말로 정과 망치를 꺼내 만면에 환한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사람을 죽일 것 같은 기시감을 주었다. 어느 기사에선가 처음 투자사에서 흥행을 위해 톱스타를 기용해야 된다는 주장에 제작자와 감독이 끝내 하정우를 관철시켰다고 하는데, 그 고집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서영희. 대사도 거의 없이 종일 묶여 있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는 서영희의 진가는 마지막 슈퍼 장면에서 단연 드러난다.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난 살인마를 차마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그저 벌벌 떨고만 있는 그 장면 자체로도 서영희는 자기 역할의 120%를 해내고 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과거에, 인정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없는 게 있는데 바로 플래시백이다. 과거 회상 장면이 없다는 얘기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모든 얘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다보니 "왜 동기가 없어?"하는 식의 불만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속 경찰들처럼 발기불능이라는 식의 억지 동기를 만들 수도 있다. 해석은 자유이고, 물론 그게 실제 동기일 수도 있지만, 영화는 동기에 천착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연쇄살인범의 동기 찾아주기를 통해 이야기의 초점을 흐렸다면 <추격자>는 오로지 추격하고 잡는데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하룻밤에 천사로 돌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중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마지막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묵묵히 교회 십자가가 즐비한 창밖을 쳐다보는 엄중호의 심정은 한마디로 암담함일 것이다. 지영민을 검거했다는 것이 그의 생활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릴 것이고, 그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보도방 밖에는 없을 것이다. 분명 하룻밤의 추격을 통해 저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인간성, 내지는 휴머니즘, 또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솟아오르긴 했지만, 그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인간적인 고민만 더 가중시킬 것이고, 그건 어떤 의미에선 거추장스런 훈장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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