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나의 친구, 그의 아내 > 는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 1명과 남자 2명이 이야기를 이룬다는 설정만 보고, 흔한 삼각관계이려니 하고 속단한다면 점점 심화되는 이 영화의 깊이에 당신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1. 영화의 특징
친구의 아내에게 한 번쯤 연정을 품어 보지 않은 남자가 있을까? 물론 이 영화가 그런 연정을 주제로 한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뜨끔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누구나 가져봤을 법한, 그러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감정들에 대해 대답하게 만든다.
당신의 best friend 와 배우자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는가? 극한 상황에서 당신은 과연 주저 않고 한 쪽을 택할 수 있는가?
아이가 죽고, 남편이 자신을 버린다. 그리고 그 남편의 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죽인 범인임을 알게 된 여자. 그녀가 벌이는 칼날 시퍼런 복수극으로 이 영화를 볼 사람도 몇몇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상투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과는 거리가 멀다.
이분법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고 선과 악을 가르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 영화는, 현실의 모호함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많은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듯이 대한민국도 뼛속까지 계급주의에 젖어 있는 나라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예준과 재문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통해 그 계급주의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잠식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고, 예준을 통해 그 역겨운 엘리트주의와 나르시즘을 함께 보여준다.
이 사회가 모순으로 둘러싸여 있듯이 영화 < 나의 친구, 그의 아내 > 의 인물과 상황 또한 그러하다. 군대라는 갇힌 곳에서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자본주의의 꿈을 추구하던 사내는 그 자본주의에 배신당한다. 아내보다 친구에게 헌신하고, 그 친구에게 자신의 아들은 죽음을 당한다.
이토록 끝없는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이 영화가 상투적 복수극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에필로그에 있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를 보고 당신은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이것은 당신이 영화를 가슴으로 보는가 눈으로 보는가를 감히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영화에 에필로그란 것이 삽입 되었을 때의 그 역할은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이고 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단순히 영화를 마무리 짓는 ( 어떻게 보면 굳이 에필로그라고 부를 필요도 없을만한 ) 에필로그가 있고 해석하기에 따라서 영화 전체의 색깔과 주제를 결정짓는 에필로그인 경우도 있다. 영화 <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에서 에필로그는 그런 면에서 후자에 가깝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꿈일 수도 있고 현실 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 영화의 색깔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영화를 가슴으로 본다면 일체의 해석이 필요 없는 장면이다. 예를 들면
‘ 아하, 이 에필로그는 영화의 초반부에 보여줬던 허름한 미용실의 설정을 다시 보여줌으로 써 수미쌍관적 구조, 즉 인생에 있어서의 회귀를 보여주는 거구나’ 랄지, ‘ 엇? 저 우체부 가 전달해주는 편지는 뭐지? 혹시 예준에게서 온 편지? 그렇다면 예준이 살아있단 말인 가? 아뿔싸 ! 그렇구나 ‘ 랄지, 더 나아가 ’ 재문과 지숙의 관계는 결국 지숙이 재문을 용 서하는 걸로 마무리 되는 거구나...‘ 등의 추리와 판단을 먼저 시도했다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우체부가 누구인지, 예준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지숙이 재문을 용서한 건지 아닌지는 이 영화에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당신이 이 영화와 그 에필로그를 보고 마음 속 저 끝에서 부글대는 무언가 부담스럽고 유쾌하지만은 않은 건더기가 느껴지고 그것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어쩌면 당신 인생 전체를 결정지을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책임감에 휘말린다면 당신은 이 미용실의 진정한 방문자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2. 영화의 주제
이 영화는 ‘ 책임감 ’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 책임감 ’ 이라는 개념이다.
특징적인 것은 이 ‘ 책임감 ’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 크게는 모든 인물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서로의 배우자에 대한 책임감. 자식에 대한 책임감. 친구에 대한 책임감. 사회에 대한 책임감. 한마디로 이 영화는 책임감으로 범벅이 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윤리 교과서 같은 느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 관계에 대한 고찰 ’ 때문이다.
관계. 그것이 여자 둘 남자 하나, 남자 둘 여자 하나 혹은 남자 여럿 여자 여럿이든 간에 우리 생활에 있어서 있을 법한 ‘ 관계 ’ 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 동안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를 통해 표현되어 왔다.
그러나 이 영화 <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처럼 마직막 에필로그까지 끝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진지하고 깊게 그 ‘ 관계 ’ 에 대한 깊은 고민을 귀엣말로 속삭여준 영화는 그리 흔지 않다..
만약 당신이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코드를 이 영화에서 읽지 못했다면 감독은 서운해 할 지 모른다. 더 이상 어떻게 친절하란 말인가? 대학에서는 운동권에 발을 담구고 가열 차게 투쟁했던 예준은 지금 뼈 속까지 자본주의의 마수에 휘말려 있다. 그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이제 그런 투쟁은 또 다른 대학 후배들의 몫인가? 잡쓰레기를 버려대는 인간들의 책임은 새벽의 청소부가 모두 짊어져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책임으로 다져지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이 한 때 마음에 들어 벗 삼았다 한들 지금 마음에 안 드는데 어찌 할 것이냐? 이것은 매우 fucking american적인 생각이다. ( 이 표현은 마음에 안 드시면 삭제, 수정 하셔도 됩니다. )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 할 수도 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 벗을 삼았을 때에 그 마음을 받아들인 그 벗에 대한 책임에서 당신은 완벽하게 자유로운가 ?
군대라는 곳이 외로운 곳이고 누구나 쉽게 의지할 수 있을 만한 곳이기에 그 곳에서의 만남은 더욱더 신중을 기해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 예준과 재문은 어떠했는가?
흔히 타인을 이용가치도로 판단하여 벗 삼았다가 내팽개치는 인간형의 본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잠재 근성으로서 내재해있다.
예준의 마음에 지숙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여전히 재문은 끈끈한 우정을 가진 친구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계급으로서, 자신이 베풀 것이 있는 친구이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의 아들을 자신이 실수로 죽게 만들고 그 아내를 자신이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예준은, 이 친구의 존재가 귀찮을 뿐이다. 한 인물을 절실한 존재에서 귀찮은 존재로 타락시키는 것은 잠재 근성을 가진 인간형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예준 또한 따뜻한 마음씨가 있고, 자기반성을 한다.
수많은 허리우드 영화에서 예준의 캐릭터는 불타오르는 자신의 몸을 보며 지숙과 재문을 함께 불길로 끌어드리려 하고, 반성할 줄 모르고 발악하며 끝없는 악의 화신으로서의 모습을 재현한다. 적그리스도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예준은 그렇지 않다. 고뇌하고 반성한다. 그의 죄조차 누가 감히 쉽게 탓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준보다 더 돈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사람도 이 세상엔 허다하다.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준과 재문, 재문과 지숙, 지숙과 예준의 관계에 대한 느낌이다. 왜 재문은 자신이 감옥에 갔을까? ‘ 그거, 그냥 사실 그대로 말하고...법적으로 풀어서 사고사처리하면 그렇게 까지 갈 필요 없는 문제 아니에요? ’
하지만 현실과 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물론 복수도 아니다. ‘ 왜 지숙은 불을 질러야만 할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지숙의 그런 행위에 도저히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는다. ’
현실엔 정당성을 가지고 불을 지르는 사람도 없고 정당성을 가지고 질러지는 불도 없다.
태워 없애야만 된다고 누가 감히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현실이라면...? 정말 현실이라면? 지숙이 두 남자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동네 사람들 뛰어나와서 구경하고, 참고 있던 예준과 재문도 서로 각자의 말을 해대며 주먹다짐하고...리얼리티를 원한다면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도 있고 가깝게는 당신 집 앞에서 간간이 벌어지는 싸움들도 있다.
지숙이 지른 불은 미용실에 지른 것이 아니라 관객의 마음에 지른 것이다. 마지막 씬에서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괴로워하며 타는 목마름을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함께 손잡고 지숙의 미용실로 가서 샴푸라도 하고 싶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지방덩어리나 패스트푸드점 보다는 미용실에 갈 것을 권한다. 가서 고개를 젖히고 샴푸를 받아보라. 향기를 느끼며 샤워기 소리의 노래를 들어보라. 그리고 당신의 친구, 그의 아내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3. 영화의 배우
재문역의 박희순은 친근하면서도 책임감 강한 캐릭터를 절제력있게 잘 풀어나갔다.
바로 옆집 형, 동생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친구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관객을 끌어들이는 세련된 연기였다.
아들 민혁이 죽었을 때의 재문을 연기하는 박희순은 실로 프로답다고 할 수 있다.
예준역의 장현성 역시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고착화되어있지 않은, 어렵고 복잡한 캐릭터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호소력있게 연기했다.
후반부 숟가락을 집어던지는 그의 작은 폭발은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지숙역의 홍소희는 신인답지 않은 차분함으로 정말 힘든 캐릭터를 무난히 소화해내었다.
이미지를 떠나, 그녀의 연기력은 지숙을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충분했고 연기자로서의 그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이 글을 적는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마치 2MB시대를 예고나 한 듯한 (신자유주의의 찬가를 참으로 시장 친화적으로 외쳐대는) 주제들이 형상화 되어 있는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제대로 된 개봉을 학수고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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