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고온 영화는 10,000BC입니다. 뭐 꼭 진지하고 예술성 높은 영화에만 높은 평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고 대중적인 헐리우드 영화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곤 합니다만, 이런 영화를 보고 올 때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전작들인 <인디펜던스데이>나 <투모로우> 같은 영화들도 평단으로부터는 엄청난 혹평을 받았지만 저는 꽤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런 영화를 재밌게 보다니 영화보는 수준이 참 형편없군, 하는 이야길 듣더라도 재미 자체가 어디로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 <10,000 BC>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지난 두어달 동안 영화관에서 거의 질리도록 예고편을 봐오면서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쫌 컸습니다. 맘모스를 추격하여 잡는 씬의 박진감, 눈덮인 산을 걸어가는 씬의 멋진 풍광, 큰 이빨의 호랑이와 맞닥뜨리는 장면의 서스펜스, 피라미드 공사장의 장대한 스펙터클, 질주하는 맘모스를 앞세운 전투씬의 박진감 등등. 게다가 두 주인공도 멋지죠!
예고편만으로 보자면 거의 반지의제왕에 글래디에이터가 결합된 영화를 기대할 수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고 온 영화는 정말 안습입니다. ㅠ.ㅠ
너무나 지루한 인트로가 계속 이어질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어린이용 디즈니 영화 분위기의 해설자가 등장해 쓸데 없는 사설을 늘어놓을 때도 나름 감독의 의도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부족의 전사들이 모여 맘모스 잡는 씬. 뭔가 박진감이 넘칠 것 같은 긴장이 이어지고...어라 근데 저렇게 썰렁하게 맘모스가 쓰러지다니... 음... 이 정도만 해도 그리 큰 안타까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적들의 습격. 예고편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의 적 전사는 간데없고 너무나 엉성하고 부실한 습격씬. 훨씬 더 처절하고 애절한 마음이 들도록 연출할 수 있었을텐데... 뭐 디테일에 약한 에머리히 감독이니 여기까지도 참아줄 수 있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우리의 주인공이 사랑스런 여친을 구하러 가는 장면. 눈덮인 장대한 산맥과 초원을 걷고 또 걷고, 걷고 또 걷고... 음... 자연탐사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니면 달력용 사진 촬영팀의 메이킹 필름인가. 지루하고 또 지루한 장면들이 이어지고...
그러다 느닷없이 정글을 만나는 것도 이상한데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쥬라기 공원으로 바뀝니다. 적의 전사들도 겁을 먹는 보이지 않는 공포스런 괴물의 등장. 그러다 드디어 괴물이 얼굴을 보이는데. 허걱. 이건 왠 꼬꼬닭. 갑자기 쥬라기공원이 양계장 영화로 변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빨 큰 호랑이와의 만남. 함정에 같이 빠져 기연을 맺는 장면 정도는 이해해줄만 했는데, 우리의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빨군은 그 다음에 다른 부족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씬에 잠깐 등장하고는 사라지고 맙니다. 나중에 이집트에서의 전투씬에서 한 역할 하나 싶었는데 영영 나오지 않습니다. 고작 이따위 역할 시킬려구 나 출연시켰냐, 하고 감독에게 불평이 컸을 것 같습니다.
이제 같은 편이 되는 다른 부족 전사들. 마사이족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 친구들과의 만남도 어처구니 없고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고추는 또 왜 등장시키는지. 아마 감독은 웃길려구 집어넣은 에피소드인 모양인데 여전히 안습입니다.
한없는 지루함이 이어지다가 잠깐 쉬어가는 코너인 나일강변에서의 돛배 장면. 아, 이 장면은 참 멋집니다. 마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현란한 색채감과 시원스런 스케일. 그런 느낌이 계속 이어질 수만 있었다면 꽤 괜찮은 영화가 되었겠죠.
그리고 드디어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던 피라미드 공사장. 세트 느낌만으로 말하자면 꽤 잘 만든 CG였습니다. 하지만 디테일에 약한 우리의 에머리히 감독 여전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또 한없이 지루한 장면들을 마구잡이로 엮어넣습니다. 그 느닷없는 장님 현자는 또 왜 등장한 것인지...
어쨌거나 이제는 좀 볼만한 전투가 벌어지나보다 했죠. 약간의 긴박감과 함께 우리의 맘모스떼들이 잠시 조연으로 출연해 한 역할 해줍니다. 그리고 노예들이 몰려가고 파라오인지 뭔지 하는 적들의 왕이 거창하게 등장하는데, 여기서 또 이해할 수 없는 협상인지 대화인지 만담인지 알 수 없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그 거대한 신전과 피라미드를 이룩한 왕궁에 노예들이 몇만명은 되어보이는데 군사들은 몇백명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 뭐 노예들을 묶어둘 전자팔찌 같은 장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하여 장대한 전투씬이 벌어져야할 이 장면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진행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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