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몰래 흘린 한 줄기 눈물.....★★★★
과연 이준익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준익 감독은 서사에 매우 뛰어난 감독이다. 그의 작품은 남성들이 중심이며, 여성들은 그저 배경이 되거나 남성들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에 발목 잡혀 사는 속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가 그리는 남성들은 대게가 철이 안 든, 아니 철이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남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한 때 가수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현재도 가오를 유지한다거나(<라디오 스타>), 생활비 한 푼 못 벌고 아내에게 얹혀살면서도 밴드를 한다거나(<즐거운 인생>),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출정 나가기 전에 아내와 아이를 죽이거나 (<황산벌>), 죽은 모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왕의 남자>)인 남자들.
주인공만이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 <님은 먼곳에>에서도 이준익 감독은 여전히 남자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달라 보일까? 달라진 것이라고는 중간에 수애(순이)라는 거울을 세워놓은 것 밖에는 없다. 순이라는 거울에 반사된 남성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그저 철이 좀 안 들었겠거니, 아니면 아직 현실에 착근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던 남성들이 알고 보니 대단히 찌질한 존재였던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찌질할 수가. 영화 보는 내내 민망해서 얼굴을 들기 어려울 정도로 화끈거렸다. 순이(수애) 눈에 비친 남성들이란 비현실적 가부장적 존재거나, 지도 모르는 사랑을 씨부리거나, 남 등 처먹는 존재들, 지들끼리 무게 잡는 게 우스운 줄도 모르고 잔뜩 어께에 힘만 들어간 찌질한 존재들.
영화의 처음으로 가보자. 아무런 장식 없는 노래 소리를 타고 화면은 낮게 드리워진 풍경을 타고 넘는다. 그 노래는 바로 순이가 부르는 노래. 순이는 시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한 달에 한 번, 군에 간 남편 면회를 가지만 언제나 확인하는 건 남편의 쌀쌀한 반응뿐이다. 순이는 결국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향한다. 대체 왜 베트남으로 갔을까? 영화적인 해답은 마지막 장면에 나오지만, 문제는 정서적으로 이해되는가의 문제이다. 앞에 말했듯이 이준익 감독은 서사에 뛰어난 감독이다. 난 초반에 소개된 순이라는 여성의 캐릭터가 베트남으로 가게 된 논리적, 정서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이는 완전한 전통적 여인상도 아니고, 현대적 여인상도 아니다. 순이는 시어머니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다. 그 때 그 때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않지만, 한 번씩은 집고 넘어간다. 완전히 복종하지도, 그렇다고 반항하지도 않는 존재. 중간적 존재. 순이가 전통적 여인이었다면 아마도 죽음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시댁에서 나와 찾아간 친정에선 출가외인이라고 받아주지 않는 상황. 현대적 여성이었다면 아마도 가출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디로 갔을까? 공장 아니면 술집. 물론 그럼에도 왜 베트남에 갔을까란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기로, 치사하고 더러워서, 뭐? 나보고 사랑을 아냐고? 그래, 내가 사랑이 뭔지 보여줄게. 어쩌면 순이는 상길의 뺨을 때리기 위해 베트남에 간 것이다 또는 베트남에 가야 하기 때문에 간 것이다.
그래서 순이는 베트남에 간다. 그녀가 베트남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쓰러지는 베트남 소녀의 얼굴을 보며 짓던 순이의 표정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소녀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전쟁이란 거대한 폭력에 대한 실감이었을까? 거대한 폭력 앞에서는 오히려 무감각해진다고 했든가, 순이의 표정은 무감각 쪽에 가까운 듯 느껴졌다. 베트남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통킹만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미국의 조작이었음이 밝혀졌고,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 공식 사과함으로서 베트남-미국 관계는 정상화되었다. 수백 년간 숱한 강대국의 침공 속에서도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던 베트남.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다며 미국의 요구에 따라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규모 전투 병력을 파견한 한국에게 베트남은 무슨 의미일까? 영화에서 베트콩에게 잡힌 정만은 베트남군 지휘관에게 ‘우리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밴드다’라고 하자 지휘관은 ‘그건 한국군도 마찬가지다’라고 응대한다. 뼈아픈 일침.
<님은 먼곳에>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면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이준익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확정지어놓고 앞의 얘기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이 결말을 좋아한다.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에서 좋아한다. 생각한 게 아니라 느낀 것이다. 개인적으로 눈물이 좀 많은 편이라 집에서 혼자 영화 볼 땐, 별 슬프지도 않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꼴에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극장이건 어디건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핑하고 눈물이 돌았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들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매우 슬펐다. 가슴이 저리도록 슬펐다. 그 장면을 돌이켜 생각해볼수록 슬퍼진다. 대체 뭐가 그리 슬펐을까? 용서받지 못할 찌질한 남성들을 용서해주는 순이(여성성)의 아량에 감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용서를 비는 상길의 심정이 이해갔기 때문일까? 면회 간 순이에게 상길은 “니 내 사랑하나”라는 찌질한 질문을 던진다(상길이 이 얘기를 할 때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 다음에 전개된 모든 장면을 들어내 버리고 마지막 상길과 순이가 만나는 장면으로 바로 연결한다면, 순이의 행동은 바로 상길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러 인터뷰에서 이준익 감독은 <님은 먼곳에>를 두고 History라 하지 말고, Herstory라 불러달라는 등, 순이의 여성성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님은 먼곳에>를 아주 감동적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준익 감독이 부여한 영화의 가치에 대해 전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준익 감독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 그것도 자신이 즐겨 얘기하던 그런 남성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으며, 거기에 단지 거울 하나를 놔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거울 자체에 대한 칭송에 몰두하느라 거울에 비추인 모습을 바라보는 행위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간과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 인터뷰 중에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건 순이가 상길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미군 장교에게 몸을 주는 (그 장면이 직접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장면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였다. 감독은 이를 기존 클리셰에 대한 전복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뭐가 전복일까? 이준익 감독에 의하면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여성이 선택한 섹스는 긍정적인가? 여성의 성 자유를 그리겠다며 섹시한 여배우의 몸을 탐하던 많은 영화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결론은 결국 그 미군 장교는 즐겼고, 그 대가로 상길이 있는 곳으로 순이를 보내준다는 것이다. 순이가 선택한 건 자신의 육체가 미군장교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며, 이 장면이 가지는 의미는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이란 한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순이가 베트남에서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서서히 변했음에도(순이의 변함은 무대가 바뀜에 따라 시각적으로 가장 명확하다) 불구하고 상길을 만나야 한다는 그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은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게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즉, 이 영화는 여성성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남성을 비추는 순이라는 거울을 세워 놓음과 동시에 남성에게 투과된 왜곡된 여성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모순된 상황에 봉착해 있다.
<님은 먼곳에>는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에 이은 이준익의 소위 음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감독 인터뷰에 의하면 음악 3부작은 처음부터 기획된 것은 아니었고, 인터뷰 과정에서 장난스럽게 답변한 것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음악 3부작의 한 작품답게 영화는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으로 인해 더욱 더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중요한 순간 노래의 힘을 과시한다. 베트남군에 잡혔을 때, 순이가 부른 ‘님은 먼곳에’. 미군에 잡혔을 때 정만이 부른 미국 국가와 ‘대니 보이’, 그리고 미군장교의 마음을 잡기 위해 실제 술을 마시고 불렀다는 ‘수지 큐’는 그 어떤 말과 행동보다 노래가 진심을 통하게 하는 데 유효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인상적인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무게감을 갖는다.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인 정진영의 연기는 영화의 중심을 잡아가는 축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고, 엄태웅은 짧지만 강렬하다. 밴드 멤버들인 정경호, 주진모, 신현탁도 마치 제자리인냥 높고 낮음이 없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는 수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수애의 연기를 아주 뛰어나다고 극찬하기는 어렵겠지만, 매우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같은 70년대를 연기했는데, <그 해 여름>이 수애를 이쁘게 보이기 위해 박제인형을 만들어 놓음으로서 오히려 마이너스로서 작용했다면, <님은 먼곳에>는 수애라는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확대해 가장 적절한 곳에 배치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준익 감독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면 적재적소에 적절한 배우들의 기용이고, 그 배우의 장점을 최대한 뽑아낸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내 눈에 가장 많이 밟힌 수애는 밴드 멤버 철식으로부터 ‘수지 큐’ 노래의 안부를 배우는 장면에서였다. 카메라는 철식의 모습을 뒤에서 비추며 안무를 보는 수애의 표정을 살핀다. 수애의 언뜻 웃는 모습이 0.1초 정도 살짝 비춘다. 아주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 순간 표정을 담아 두고 싶을 만큼 좋았다. 약간 중저음 허스키인 수애의 목소리는 특히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 빛을 발한다. 프로 같은 기교는 없지만 무공해 청정 느낌을 줌으로써 호소력을 더해준다.
※ 영화 보기 전에 이준익 감독과 출연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있다고 해서 미리 입장해서 앞자리로 달려갔는데, 안타깝게도 수애는 다른 촬영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고, 감독과 정진영 씨만 참석했다. 많은 남성들의 안타까운 탄식. -,-;; 얼마 전까지 내내 가방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가 요즘 비도 오고해서 안가지고 다녔는데, 그나마 앞자리라 핸드폰 카메라로 찍긴 했지만, 역시 폰카로는 역부족이다.
※ 옆자리에 몇 명의 대학생이 앉아 있었는데, 영화 초반부 크레딧에 주진모 이름이 올라가자 시끌시끌이다. ‘주진모가 나와?’ 동명이인인 줄도 모르고 일부 여학생이 좀 들떴었나보다. 영화 중간중간 계속 확인이다. ‘어디 주진모가 나와?’ 그런데 그 일행 중 아무도 주진모를 모른다. 나원참. 하도 귀에 거슬려 끼어들고 말았다. ‘저 사람이 주진모거든요. 이제 조용히 하고 영화 봅시다’ <타짜>, <즐거운 인생>, <바르게 살자> 등으로 나름 여기저기 익숙한 얼굴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주진모는 <미녀는 괴로워>의 주진모 밖에 없는가보다.
※ 배우 정진영을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하지만, 실제 모든 이준익 감독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정진영이 아니라 신정근이다. 그래서 MBC TV의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는 신정근을 이준익 감독의 진정한 페르소나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영화를 한참 봤는데도 나오질 않는다. 어찌 된 것일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대대장 역으로 얼굴을 비춘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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