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 발을 디딘 인어공주의 험난한 모험기...★★★★
과연 자본주의의 욕망이 넘실대는 현대 러시아에 인어공주가 왕림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러시아 영화 <나는,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기본 줄거리를 차용해 만든 한 소녀의 험난한 성장기, 모험기이다. 그 소녀의 이름은 알리사. 영화는 파란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는데, 그 물고기는 바로 알리사 엄마의 옷에 그려진 무늬들이다. 시작부터가 참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바다에서 알몸으로 헤엄치던 엄마와 그곳에서 쉬고 있던 아빠가 만나 물속에서 사랑을 나눴고, 그 결과로 알리사가 태어난다. 알리사는 인어공주와 마찬가지로 바다 속에서 태어난 셈이다.
<나는, 인어공주>는 조금은 난삽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이런 난삽함이 혹시 러시아 문화의 특징인가? 많이 본 건 아니지만, 러시아 영화는 좀 정신없고 오락가락한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하며, 음악의 사용도 적절하다. 홀아버지 밑에서 크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와는 다르게 알리사는 할머니, 홀어머니로 이어지는 모계 가정에서 자란다. 알리사는 6살 때 남자와 잠을 자는 엄마를 보고는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동화 속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말을 잃는 것이라면 알리사의 침묵은 스스로의 주체적 결정에 의한 것이다. 장애인 학교에 보내진 알리사는 졸업을 앞둔 10대 후반, 우연히 초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초능력으로 마을에 태풍을 불러와,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된다.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알리사도 물에 빠진 사샤를 구해준 후 그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알리사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저기서 동화의 설정은 전복되어 나타난다. 동화 속 인어공주, 왕자와는 달리 첨단 자본주의, 돈만 쫓는 원시 자본주의가 넘실대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사는 공주와 왕자는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한다. 알리사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지만, 숨어서 다른 사람을 쳐다볼 수 있는 이동 광고판 아르바이트를 제일 맘에 들어 한다. 이건 대도시의 익명성 또는 소통 부재에 대한 일종의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재밌게도 사샤의 직업은 달의 땅을 파는 일이다. 허무맹랑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사샤의 직업은 실제로 있는 직업을 모델로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현실 같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달로 우주선을 보낸 미국이나 러시아 사람들에게 우주여행은 가까운 현실인가보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의 데니스 호프라는 사람은 자신을 Head Cheese(달이 치즈로 만들어졌다는 미국인들의 오랜 믿음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신을 달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로 일컬으며, 캘리포니아 주에 달 대사관(Lunar Embassy)을 차려 놓고 달과 화성의 땅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했다. 데니스 호프가 제시한 땅값은 달이 217만 5000평에 1만 7000원 정도이고, 화성이 2400평에 2만 6천원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화성 땅을 구매하기 위해선 ‘기존의 생명체들과 마찰 없이 지내야 한다’는 조건에 동의를 해야 가능했다고. 그런데 이 허무맹랑한 사업은 엄청나게 인기를 끌어서 레이건 전 대통령, 톰 크루즈, 클린트 이스트우드, 버트 레이놀즈 등 유명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구매해 엄청난 이득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프의 주장은 ‘먼저 차지한 사람이 임자’라는 것이고 변호사들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왜냐면 1967년 체결된 ‘국제외계협약’은 특정 국가가 천체 전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샤는 지구 땅은 마구 팔아대면서 왜 달 땅은 팔면 안 되냐는 나름 냉소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를 돌이켜보면 영화 <나는, 인어공주>의 마지막도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걸 예감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도대체 비극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움과 유쾌함, 명랑함이 어우러져 있으며, 밝고 경쾌하다. 그러면서 화면은 모스크바 시내의 각종 현란한 광고판을 열심히 비추어 댄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승자는 얻고 패자는 잃는다’ ‘발전과 진보는 당신의 몫이다’ 등등. 어찌 보면 동화적 구호 같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적 살풍경을 대표하는 아찔한 구호들이다. 특히 알리사의 아파트를 뒤덮은 상품 광고 현수막은 인어공주가 물에서 나와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고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한다. 예상한 대로 동화 <인어공주>를 차용한 <나는, 인어공주>는 비극으로 마감한다. 알리사의 말대로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도시에선 언제나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동화의 왕자처럼 사샤도 자신의 목숨을 살린 알리사를 잊어버린다. 영화 중간 중간 알리사는 자신이 염원하는 세상을 꿈 또는 환영으로 드러낸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비극 뒤에 펼쳐지는 알리사의 환영 장면일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잉크를 하는 알리사의 상큼한 미소는 비극과 겹쳐지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마지막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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