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에는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각자의 방을 갖고 자리잡게 된다고 한다.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기관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정보들이 스쳐가지만 그 중에 조금 더 강한 신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도 그 말캉한 뇌의 어느 한 부분에 문신처럼 새겨지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연필처럼 휘갈겨 써졌다가 뒤미처 따라오는 지우개에 말끔히 지워지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마치 힘을 조금 더 주면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근육처럼 단지 아주 조금만 더 집중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훨씬 견고한 기억의 방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기억의 방이라는 곳은 기억하는 사람의 '주관'에 의해 다른 방 들과 단절되기도 하고, 낙인처럼 선명한 기억에 대해서 조차 '나는 모르오' 하며 고개를 휘젓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용' 이라는 것과, 본질도 아닌 '파생' 이라는 것들 때문에 그 뿌리인 실물과 세계 경제가 파탄이 나는 웃지 못할 주객전도가 벌어지고, 그 잘난 척 하던 국가들이 자기 국민들 침 닦아 주기도 바빠진 이 판국에도 그리 멀지 않은 중동에서는 반세기 넘도록 서로가 서로를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단지 구약성서에 '그 땅은 너희에게 약속된 땅이며 그 땅의 다른 종족들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는 글귀 몇개가 적혀 있다는 근거로, 이교도라는 문패를 가졌을 뿐인 '이웃'들을 벌레 처럼 몰아내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스라엘의 초등학생 들 조차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 는 성경 글귀가 자신들의 땅에 사는 다른 민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것이라 믿는다고 하니 이 비극이 다음 세기에도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수천년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던 유태인들이 자기네 땅이라고 들어와서는 그 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떠돌이로 전락시킨지 35년째 되던 1982년, 이집트의 대통령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협정에 사인하면서 팔레스타인 인들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인들을 부담 으로 여긴 요르단 국왕까지 그들을 배척하면서 완전히 갈 곳을 잃은 이들은 그 당시 국방이 허술하던 레바논 으로 캠프를 옮겨온다. 새롭게 정비된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활동을 강화하게 되면서 기존에 이스라엘에 우호적이던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을 등에 업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의 대리전은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레바논에 주둔하던 시리아 군이 축출되고 PLO는 튀니지로 쫒겨가게 된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레바논 기독교 대표인 [바시르]를 대통령으로 추대했지만 테러로 살해당하자 기독교 민병대는 그 보복으로 사브라 난민 수용소에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 수천명 (그것도 대부분 어린이와 부녀자들인) 을 무차별 학살 하게 된다. 이스라엘 군은 야간에 일어난 이 천인공노할 현장에서 자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수용소 밖을 에워싸고 쉼없이 조명탄을 지원함으로서 아낌없는(?) 방조를 일삼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올해의 가장 빛나는 영화'중 하나로 일컫는 [바시르와 왈츠를]은 1982년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사건에서 일어난 사브라-샤틸라 난민 수용소 학살사건 현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군인의 기억을 쫒아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20여 년전 레바논 침공에 참전했던 아리폴만 감독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참전 동료로부터 악몽을 꾼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 동료는 동네 개들을 처치하는 역할을 도맡았었는데 최근에 갑자기 밤마다 그 개들이 떼지어 몰려와 자신를 향해 짖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 친구와 마찬가지로 주인공(감독 자신)도 전투에 참전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그 당시 레바논 해변에 누워서 하늘을 수놓던 조명탄을 바라 보던 기억 외에는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음을 알게된다. 결국 그는 당시 함께 했던 동료들을 어렵게 찾아내어 조각난 기억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하는데...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의 제목은 전투 당시 동료 중 한명 인 프렌켈이 총알이 빗발치는 도로 한복판에서 친 이스라엘 인사인 '바시르' 의 포스터 옆에서 기관총 반동에 의해 스텝을 이러저리 옮기며 난사하던 모습을 마치 왈츠를 추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동료들의 증언들을 통해 하나둘씩 사라졌던 기억들이 주섬주섬 담기기 시작하면서 주인공(감독)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조명탄 터지던 레바논 해변의 기억으로 서서히 연결되기 시작한다. 뭉터기로 잘려나갔다가 간신히 봉합된 팔 다리에 의해 일으켜진 듯한 그의 기억은, 다시 그 해변으로 그를 돌려보내 마침내 그렇게 잊고 싶었던 기억의 현장속으로 걸어들어 가게 만든다. "
'사브라-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은 이후 살아남은 피해자 가족들에 의해 소송이 제기되었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인류의 치욕스러운 사건' 으로 남게 되었다. 그 상처는 학살을 당한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방조했던 이스라엘 군인들의 뇌리속에서도 휴화산 같은 죄책감으로 살아 남아 이렇게 20년이 지나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놀랍도록 생소한 구성과 충격적인 결말이 갖는 강력한 힘을 가졌음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 어느쪽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너무나 이성적이고 냉정해서 상처를 준 쪽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상처를 받은 쪽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제 당사자인 아리폴만 감독은 기억상실증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그 기억을 어렵게 끄집어 내면서도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거나 '미안하다'는 말 조차도 하지 않고, 다만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라는 투로 담담하게 끝을 맺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기법 덕분에 상영시간 내내 이것이 '다큐멘터리' 라는 것을 망각하게 했던 이 영화는 정말 충격적인 마지막 반전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장면이야 말로 망각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공포영화에서나 봄 직한 살육 현장의 모습이 생생히 보여지고 그 속을 미친 사람들 처럼 돌아다니는 유가족 들의 짐승같은 울음 소리. 그리고 '내 탓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군인들. 무방비 상태였던 관객들을 악몽같은 현장에 갑자기 밀어넣고는 눈과 심장을 동시에 얼어붙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받았을 관객들의 공포와 현장감은 그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잘잘못을 굳이 따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영화를 보고나서 최소한 며칠동안 아니, 몇년 후라도 떠오를 잔상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하고 싶다. 왜냐하면 영화를 본 지 불과 한달 만에 거짓말 처럼 중동에는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고 각국의 이해관계와 강대국의 묵인 속에서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폭격에 스러져가고 있으며, 내 생각만 하며 살기도 바쁜 필자가 이렇게 죽치고 앉아 '세계평화'를 비는 간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으니..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 어떤 목적과 보복의 명분도 학살을 합리화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로 비롯된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도 줄어지지도 않는 중금속 처럼 인류와 역사속에 떠다니게 될 뿐이라는 메세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하느님은 진정 무고한 생명을 모두 죽이면서까지 유대인들이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라실까. 그것이 진정 그 분의 뜻일리가 없을진대, 하루 빨리 그들의 복잡한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살육의 전쟁을 중단하고 그 대지와 그 곳에 사는 인간들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바시르와 왈츠를]은 명동 스폰지하우스(구 중앙극장)에서 계속 상영중이니 놓치기 전에 혼자라도 달려가 보았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부디 2009년 올 한해는 어려운 경제 여건 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나' 보다는 '세계 이웃' 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보다 큰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소망을 빌어본다.
PS) 오래 전 어느 추운 밤, 인적 드문 길에 쓰러져 있던 사람을 방관한 채 발걸음을 옮겼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때 그 사람 죽지는 않았을까.. 나는 왜 잠이 오질 않을까..
Filmania 원성백, cr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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