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가진 자는 전진한다. 총이 없는 자는 총을 가진 자를 뒤따른다. 총을 가진 자가 죽으면 그 총을 들고 전진한다."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전투...순간 누군가가 후퇴를 외친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소련군을 향해 그들의 전우인 또다른 소련군들은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겁장이에게 자비란 없다"고 외치며... 탱크와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독일군의 폭격 속에 바람결 꽃잎처럼 쓰러져가는 소련군들...독일군들은 마지막 확인사살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숨쉬는 끈질긴 생명도 존재한다.
총알 몇개를 들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용케 살아남은 바실리...전우들의 시체더미 속에서 폭격소리의 리듬에 맞춰 독일군을 향해 방아쇠를 하나씩 당기는 바실리는 비장하다 못해 안쓰러워 보인다.
소련군 장군은 이 끔찍한 전쟁을 두고 '신성한 저항의 의무'라고 말했다. 세상에~~~누구를 위한 위무란 말인가? 무엇을 위한 저항이란 말인가? 언제나 그랬듯이 힘든 시대는 영웅을 원했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불행하게도 바실리 자이체브는 영웅으로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러시아의 실제 전쟁영웅이었던 바실리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2001년 베를린 영화제 오프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장 자끄 아노가 만들어서일까?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미국의 메이저급 영화사인 파라마운트가 제작했지만, 그동안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선악구도의 전쟁영화와는 다른 듯 싶다.
난 사실 전쟁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동안 인상깊게 보았던 전쟁영화라고 해봤자, <플래툰>이나 <쉰들러 리스트> 정도랄까? 암튼 남들이 다 사실적인 영상에 놀라웠다고 감탄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조차 일부러 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보게 된 것은 <연인>을 만들었던 장-자끄 아노가 전쟁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군복을 입은 쥬드 로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역시 장 자끄 아노의 영상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영화음악도 훌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쥬드 로와 조셉 파인즈의 연기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