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희망이 아니라 끔찍한 형벌이다.. ★★★☆
때는 1928년 미국 LA. 전화 교환국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은 9살난 아들 월터 콜린스와 함께 싱글맘으로 살아가고 있다. 원래는 쉬었어야 할 토요일, 갑작스런 호출로 근무하게 된 크리스틴은 퇴근 후 아들이 실종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로부터 5개월 뒤, 경찰이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알려주지만, 눈 앞에 있는 아들은 다른 소년. 그러나 경찰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해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크리스틴은 구스타브 목사(존 말코비치)와 함께 거대한 공권력에 맞서리라 결심한다.
2008년 5월, 제61회 칸 영화제 상영 후 많은 기자들이 “저게 정말 실화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체인질링>은 현 시점에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해할 수 없는 시대의 공기를 그리고 있다. 당시 LA는 시장과 경찰청장이 지배하는 일종의 도시국가로 온갖 부패와 협잡, 각종 범죄가 들끓는 도시였다. 범죄의 중심엔 범죄를 척결해야 할 경찰이 자리 잡고 있었고, 경찰로부터 더 큰 범죄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LA를 우리는 이미 <LA 컨피덴셜>에서 목도한 바 있다.
<체인질링>은 경찰 앞에선 누구나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특히 상대적으로 더 약자인 여성에게 현미경을 들이댄다. 코드 12는 경찰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여성들에게 발동되는 일종의 보복 조치다. 크리스틴이 감금된 정신병원엔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잡혀 들어온 여성들로 가득하다. 이들이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 경찰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은 정신병원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것이 단지 자기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란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사실 <체인질링>은 아들을 찾으려는 엄마의 일반적인 모성이라든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부조리를 다루는 비슷한 영화들과 조금 궤를 달리한다. 유달리 책임이 강조되는 영화는 어느 정도는 계몽적으로 비춰지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최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와도 궤를 달리한다.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아버지의 깃발>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살아 있는 신화로 만든 최근 작품들을 보면, 선과 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의와 불의, 합법과 불법, 아군과 적군 등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채 혼동된 또는 그 경계에 서 있는 인간들의 얘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가 작품과 출연 배우들의 캐릭터를 깊게 함으로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호평을 이끌어 낸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체인질링>은 실제 그랬다고(영화의 처음 부분에 A True Story라는 자막이 깔린다. 보통은 그 앞에 Based On을 붙이는 걸 고려해보면, <체인질링>은 말 그대로 정말 실화다) 해도 인물군이 선악으로 너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간지점은 찾기 어렵다. 선의 진영에 크리스틴을 포함해 구스타브 목사, 변호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면, 악의 진영엔 존스, 경찰청장, LA 시장과 함께 이 영화의 또 다른 축을 이끌고 있는 고든이라고 하는 희대의 살인마가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의문인 인물이 바로 고든이다. 이유도 없고 동기도 없는 그의 살인 행각은 마치 순수한 악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영화의 리얼리티를 훼손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크리스틴과 만난 고든이 ‘신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은 <밀양>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데, 두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그 장면만 놓고 본다면 <밀양>이 한수 위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체인질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작품과 비교해서 보면 너무 명확해서 의아할 정도며 다른 작품에 비해 좀 처진다.(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범작은 다른 감독이라면 걸작이란 평가는 정확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러티브의 촘촘함이나 꽉 짜인 틀은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란 평가를 얻어내기에 족하며 무려 141분이나 되는 상영시간이 결코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힘도 상당하다. 특히 모든 게 말끔하게 정리될 듯한 분위기에서 묘하게 끝난 마무리는 역시 거장의 손길은 다름을 느끼게 한다. 누구는 이 영화의 결론이 희망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걸 결코 희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아이를 잃은 어미에겐 평생에 걸친 천형이다. 어미에게 희망이라면 월터의 생사 여부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마지막 ‘크리스틴은 평생 월터의 생사를 확인했다’(정확하지는 않지만)는 자막을 보는 순간, 난 가슴이 허물어짐을 느꼈다. 과연 크리스틴의 남은 삶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 안식이 찾아올 수 있었을까? 이건 정말 공포영화보다 더한 공포다.
※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는 좋았다. 그래서 골든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흠 잡을 데 없이 좋은 연기긴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다!!’라면서 환호성을 보낼 정도의 연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해서도 동일한 평가가 가능하다. 어쨌거나 최고의 연기력을 보유한 헐리웃의 미녀 배우들을 보면 참 부럽다. 우리 같으면 작품보다는 광고 출연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최악의 작품, 최악의 연기자에게 주어지는 골든라즈베리 같은 영화제가 성대하게(?)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
※ 1928년 LA 경찰의 말도 안 되는 행태를 보고 있으려니 현실의 대한민국 경찰이 자꾸 어른거린다. 자신들의 실수(무리한 진압으로 6명 사상)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철거민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경찰.(일개 네티즌의 실수가 구속 사유가 되고, 불법 폭력시위하면 죽어도 괜찮은 거냐?) 온갖 거짓말로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찰총수 내정자. 약자들끼리의 연대를 배후조종, 외부세력 개입이라며 공격하는 공권력이 용역업체의 온갖 폭력과 개입에는 왜 눈감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경찰이 1928년 LA에 있었다면 구스타브 목사는 분명 배후조종과 외부세력 개입 혐의로 처벌되었을 것이다. 한 미국 유학생이 미국 친구들에게 미네르바 사건에 대해 얘기해주자 심각하게 듣고 있던 미국 대학생이 “김정일이 죽고 나면 그래도 좋아지지 않을까”라며 말하더란다. 그래서 그 유학생이 북한 얘기가 아니라 남한 얘기라고 하자 미국 대학생 왈 “You Kidding Me?”라고 하더라나. 아무래도 현실의 대한민국을 영화로 만들면 외국 기자들이 “저게 정말 실화냐”며 믿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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