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가족 사이를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 그래도 역시 가족... ★★★★
내용도 내용이지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무엇보다 영화의 형식이 독특하다. 내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전반적으로 친구의 집들이에 가서 결혼식 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실제 촬영 현장에서도 몇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돌아가 배우들조차 어느 카메라를 중심으로 동선을 잡아야 할지 몰랐다고 하고, 심지어 하객(?)이 캠코더로 촬영한 화면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다보면 극중 배우들이 카메라를 보고 “제발 그만 좀 따라다녀”하면서 짜증을 낼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약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던 동생 킴(앤 해서웨이)이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 퇴원해 집으로 온다. 이혼한 엄마 애비(데보라 윙거)도 참석해 화기애애한 결혼식 준비. 그러나 가족 사이를 스산한 기운이 헤집고 돌아다닌다. 가족에게 숨겨져 있는 아픈 과거로 인해 가족들은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독한 말로 서로를 공격한다. 그래도 결국 서로를 품에 안을 수밖에 없는 가족.
‘가족’이란 어감은 참 묘하다. 익숙함, 친숙함 또는 천부적인. 그러나 오랜 시간 함께 해 왔다는 친밀함으로 인해 참혹한 결과를 잉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댄 인 러브>에서의 가족처럼 도무지 개인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분위기는 나를 질식하게 만들며, 반면 <준벅>에서의 느낌 - 익숙함 속의 외로움이 좀 더 현실적인 가족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차원에서 가족 안에서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 받거나 개인의 인격 또는 자존심이 상처 받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그럼에도 상처를 준 사람은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왜냐면 가족이니깐), 상처를 받은 사람도 대게는 그냥 묻어두고 넘어간다(왜냐면 가족이니깐).
언니 레이첼과 동생 킴, 둘 모두 서로에 대해 피해의식이 있다. 레이첼은 아버지에게 “왜 킴만 감싸고도느냐? 아버지가 감싸고도는 바람에 쟤가 저렇게 됐다”며 킴이 혜택 받는 입장이었음을 강변하는 반면, 킴은 레이첼이 임신했다는 얘기에 언니에게만 집중된 행운을 저주한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한편, 가족들 모두는 킴이 입을 여는 순간, 아니 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안해하고 경계한다. 킴이란 존재는 가족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비극과 동일하다. 카메라는 환하게 웃으며 킴을 반기던 가족이 킴이 돌아서는 순간 얼굴에 떠올리는 경계의 표정을 무심한 듯 건조하게 담아낸다. 이렇듯 감춰진 비극은 그저 무심코 꺼내놓은 접시 사이와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 친구와의 대화에서 순간 순간 이빨을 드러낸다. 그러다 킴은 결국 폭발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어? 마더 테레사처럼 살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 무슨 차이를 가지겠어? 내가 남은 생 동안 받을 수 있을 사랑의 기회들을 전부 희생해야겠어?”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난 킴의 어깨에 에단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문신을 본 순간, 레이첼은 조용히 킴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상대방으로부터 입은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끝내는 품에 안아야할 대상, 그것이 가족이던가.
마지막으로 <레이첼 결혼하다>는 대단히 정치적인 영화다. 미국 대선을 앞둔 시기에 개봉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그리는 결혼식 풍경은 마치 오바마(당시는 선거 전이긴 했지만) 취임식장이 연상될 정도다. 흑인 남편과 백인 아내, 아시아계 친구와 남미계 하객들. 그러면서도 어떤 인종 편견적 발언이나 느낌은 찾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는 대사를 유달리 몇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모든 인종의 화합, 이것이야말로 오바마가, 아니 오바마 지지자들이 꿈꾸는 미국이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킴에게 하와이로 놀러오라는 신랑 들러리의 대사조차 묘하게 들린다.(알다시피 오바마가 자란 곳이 하와이다) 그래서 킴이란 존재, 또는 킴의 가족사에 어린 비극은 부시 시대에 펼쳐진 복수와 광기의 전쟁을 의미하며, 그런 복수와 광기의 전쟁을 지지한 미국인들 자신이 바로 감추고픈 비극인 것이다. 심지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한 부시의 거짓말과 강간당했다는 킴의 거짓말도 묘하게 겹친다. 사실 부시와 전쟁을 지지한 미국 국민들과 오바마와 평화를 지지하는 미국 국민들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다.(한 때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는 90%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자료를 찾아보니 미국에서 개봉 당시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민주당 영화라며, “다가올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즉, <레이첼 결혼하다>는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그려보는 오바마 시대의 희망이다.
※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프린세스 다이어리>에 나온 앤 해서웨이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라고?’라며 놀라거나 반감을 표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면 앤 해서웨이가 만약 케이트 윈슬렛을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수긍했을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망가진 몸매와 함께 관객의 시선을 한 편의 홈 비디오에 집중하게 하는 원천을 제공한다. 그런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같이 출연한 메릴 스트립은 영화 촬영 직후에 “앤의 미모야말로 그녀의 재능을 가리는 최대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불과 2년 만에 자신과 함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같이 노미네이트될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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