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의 연관성을 숙명처럼 갖게 될 것 같다. 같은 독립영화에 빈민을 다뤘던 점에서 공통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만은 예외였다. 똥파리엔 환상과 기적이 제거됐기 때문이다. 슬럼독의 주인공이었던 자말과 살림이란 두 형제들의 이야기 중 환상과 기적의 대상이던 주인공 자말이 제거된 영화가 바로 ‘똥파리’란 영화다. 가난과 빈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매몰된 인간성. 그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게 되는 비참한 인간들의 군상들을 이 영화는 뛰어난 남녀 주인공들의 열연과 함께 거친 욕설과 상황설정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이 영화는 내가 본 기억 남는 명작 중 하나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두들겨 맞고 있는 여자를 위해 거친 남자(주인공 상훈)가 가해자인 남자를 패는 것으로. 잠시 동안 그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두들겨 맞았던 여자의 뺨을 때리기 시작한다. 왜 맞냐고 하면서. 이런 첫 장면을 통해 주인공 캐릭터는 확실하게 규정된다. 즉 그는 폭력배였다.
주인공 상훈은 거친 남자다. 그의 현직은 용역깡패였고 그는 자기만큼 어려운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벌어들인 소득은 일과성 도박으로 날리기 일쑤였다. 그는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 그냥 형편없는 인간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그의 과거와 그 과거에서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는 역순행적 구조를 갖는 영화임을 암시한다.
기이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주변은 그에겐 행복과 부담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 얼마 전 출소한 아버지는 어릴 적 상훈의 어머니와 누이를 숨지게 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구타한다. 또한 4살이 많은 친구 같은 그의 직장 상사 만식은 그에게 일을 맡기고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그가 갖도록 하는 좋은 형 같지만 어쨌든 그에게 용역깡패 짓을 시키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직장상사인 그에게 형이란 호칭도 깍듯한 예우는커녕 욕만 퍼붓는다. 그리고 배다른 핏줄인 이혼녀 누이와 그나마 그가 애정을 쏟는 조카가 있다. 누이에겐 쌀쌀맞게 대해도 조카에게만 그는 정성을 다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불현듯 찾아온 여고 3학년생인 연희는 그에겐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준다.
연희에 앵글을 들이대면 그녀 역시 불행을 타고 난 여자다. 아버지는 월남전에서의 충격으로 정신적 상흔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던 시절, 용역깡패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영화에선 상훈이가 바로 가해자이지만 그런 인간관계가 한국드라마에선 인과성을 갖지 않게 나온다. 그리고 남동생이지만 거칠고 누나에게 욕과 구타를 서슴지 않은 현실을 도망치기만 하려는 영재가 가족 구성원으로 있다. 연희 역시 힘든 생활고에 헉헉거리는 그런 학생이다.
이런 둘의 관계는 서로간의 불행을 감싸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애인 관계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힘들 때 전화로 만나자고 이야기할 인간관계를 그들은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우정도 사회의 냉혹함 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상훈의 마음이 풀리면서 어려운 가족들을 위해 최소한이나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 하고 그런 와중에 그는 가족의 가치와 소중함, 그리고 가족 속에서의 행복을 어렴풋이나마 찾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자살시도 앞에서 그는 가족에 대한 비극을 느끼며 조카의 슬픔 속에 가족에 대한 미련을 결국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반대편인 연희의 가족은 파국으로만 간다. 동생 영재는 용역깡패로의 길을 가게 되며, 그를 통해 어려운 가정의 파국처럼 그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들을 갈취하는 또 다른 상훈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기이한 사건 전개는 결국 시작부터 암시된 비극으로 종말을 맡게 된다. 모든 일을 관두고 새 출발을 시작하려는 상훈은 그의 마지막 업무에서 자기의 조수였던 영재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슬픈 단면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죽음만이 이 영화의 진정한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즐거운 기분을 갖고 거리를 걷다, 포장마차를 두들겨 패고 있는 동생 영재를 보게 된 연희의 알 수 없는 비극의 얼굴과 영재의 모습에서 투영된 상훈의 모습은 이 영화의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즉 가난한 자들은 서로를 학대하면서 자기들을 아픔을 상대에게 전가하면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가난한 자들의 빈곤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의 비극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서로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지만 그들의 관계는 다시 뒤바뀌기도 하는 너무 처절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또한 그들은 벗어나기 힘들기도 하다. 아버지의 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의 또 다른 폭력으로의 전환, 그러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또 다란 가해 행위. 이런 가해에 근거인 사회적 빈곤과 그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 그들의 처지는 이 사회에 정면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우릴 놔 둘 것이냐 라고.
영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을 담고 있지 않다. 경쟁이든 탐욕이든 엄청난 다수의 희생자들을 잉태하는 현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놓지 않는다면 촬영지였던 중계본동이 계속 확산될 것이며 결국 우리 모두 파멸이란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 점에서 슬럼독이 환상과 기적을 통해 피해간 사회적 문제의식을 재현하며 동시에 슬럼독의 비겁함을 비판하고 있다.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빈곤엔 기적과 희망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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