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한다면 더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
※ 스포일러 있습니다.
1959년 미국의 한 초등학교, 50년 후에 열어볼 타임캡슐에 넣을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그런데 루신다(라라 로빈슨)는 귀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따라 도화지 가득 숫자를 써넣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교사가 종이를 걷자 못다 적은 숫자를 조그만 창고 문에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적어 넣는 루신다. 50년이 지난 2009년 현재. MIT 공대의 천체 물리학 교수인 존 코슬러(니콜라스 케이지)는 아들 케일럽(챈들러 켄터베리)이 받아온 숫자가 가득 적힌 루신다의 편지에서 우연히 911012996(?) 이란 숫자를 발견하곤 이리저리 맞춰보다 이 숫자가 9/11/01/2996이며 2001년 9월 11일 2996명이 사망한 9ㆍ11 테러와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결국 존 교수는 루신다가 적은 숫자엔 지난 50년간 전 세계에서 발생한 대형 재난사고가 적혀 있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3건이 더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비행기 추락사고와 지하철 탈선 사고를 겪은 존은 루신다의 딸 다이애나(로즈 번)와 손녀 애비(라라 로빈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들은 남은 하나의 재난이 전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숫자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과연 이들은 지구 멸망을 막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대단히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영화일 수도 있고, 허무하고 김빠지는 그래서 욕 나오는 영화일 수도 있다. 두 개의 반응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영화는 과학과 철학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인 결정론 대 비결정론 중 결정론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종말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는 대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결정론이 구시대를 대표한다면 양자물리학 이후 비결정론이 대세라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과학적 지식이 짧은 나로선 단정 짓기 어렵다. 다만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변할 수 있다는 쪽에 좀 더 믿음이 간다. <노잉>은 결정론에 입각한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의 결론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주인공 존은 넋이 나간 듯 말한다. “지구 멸망을 어떻게 막지?” 불행하게도 우리의 주인공 존은 정부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 있는 인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지구 멸망을 막을 힘은 없다. 정확하게는 지구 생명체의 멸종이겠지만. 영화 초반 존 교수는 강의 시간에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차이를 언급하며, 자신의 견해가 비결정론 쪽이라고 얘기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노잉>은 비결정론자였던 존이 결정론자로 변화되는 과정을 살피는 영화로 볼 수도 있다.
결정론에 입각한 종말론을 다루는 영화임에도 결국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을 부여하며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은 <노잉>의 또 다른 축이 종교와 가깝다는 걸 의미한다. 결정론 자체의 종교적 색채와 맞물려 이 영화엔 많은 종교적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다. 선택된 자들, 휴거, 불에 의한 멸망, 아담과 하와, 무화과 등등. 그러면서 교묘하게 종교와 SF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아이들과 검은 옷을 입은 기묘한 사람들이 떠나는 장면에서다. 이 때 검은 옷의 사람들의 모습은 외계인 같기도 하고, 천사 같기도 한 묘하게 중성적 이미지를 남긴다. 이러한 경계 이미지들은 과도한 종교적 편향으로 인한 부담감을 덜어주는 동시에 전통적인 SF 팬을 향한 구애에 다름 아니다.
<노잉>의 또 다른 뚜렷한 특징은 이 영화가 장르적 혼성 영화 또는 잡탕영화라는 점이다. 영화의 초반은 숫자가 중심이 된 음모론(<넘버23>)을 다룬 스릴러의 분위기를 풍기며, 이런 분위기는 나이트 샤말란을 연상시킨다. 또 대형 재난 블록버스터로서의 재미(?)도 던져준다. 특히 비행기가 떨어지고 지하철이 탈선하는 장면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그런데 ‘끝내준다’는 표현은 기존 재난 영화를 관람할 때처럼 ‘즐긴다’는 것보다는 거의 ‘참고 견뎌야’ 하는 정도의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함으로서 끔찍하다는 정서에 좀 더 가까움을 의미한다. 사실 <노잉>은 두 차례의 재난 장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면에선 충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잉>은 <딥 임팩트>라든가 최근의 <지구가 멈추는 날>을 연상시키는 SF 장르를 불러들인다. 일부 장면과 분위기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SF 영화들의 장면과 분위기가 연상되기도 한다.
결국 지구는 우주(또는 신)에 의해 오래 전부터 멸망이 결정되어 있었으며, 그것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느냐는 것이 <노잉>이 하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결부되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도대체 지구 멸망은 왜 결정되었느냐이다.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은 생성→성장→소멸의 단계를 거친다는 점에서 당연히 지구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겠지만, 그것이 영화에서처럼 결정론으로 치장될 수는 없을 터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선 은하계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지구를 철거하며,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한다. <노잉>의 결론을 보자면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까워 보이지만, 인류의 완전한 절멸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인류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아담과 하와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럴 정도로 인류가 과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왔는가? 글쎄. 난 그 점에선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나에게 이 영화의 결론은 희망이라기보다는 그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에 좀 더 가깝다.
※ 김지운 감독조차 <놈놈놈>을 개봉한 직후 어떤 인터뷰에서 “볼거리를 위해 스토리를 희생시켰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과거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해줄만하지만, <다크 나이트>나 <노잉> 이후로 그런 식의 변명(?)이 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크 나이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볼거리와 이야기는 결코 충돌하지 않으며, 어느 한 쪽이 희생되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둘의 양립을 위해 필요한 게 자본인지 또는 아이디어인지 또는 다른 그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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