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몇년 간 헐리웃 재난영화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꽤 눈에 띄게 바뀌고 있다. 최근 나온 대부분의 헐리웃 재난영화에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자'라기보다는 단순히 '체험하는 자'에 머문다. 예전같았으면 제 아무리 혈혈단신이라도 어떻게 여력이 닿아서 재난의 근본을 뿌리뽑는 데 큰 기여를 하겠지만 이들은 다르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며, 그들이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재능적으로 몸을 피하는 일 정도다. <우주전쟁>에서 톰 크루즈는 더 이상 임파서블한 미션을 수행하는 1인 영웅이 아닌 그저 생존하기에 급급한 평범한 아버지였고, <클로버필드>에서의 주인공은 괴물이 왜 도시를 깨부수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가는 게 가장 중요할 따름이었다. 이는 재난에 대한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성찰의 기회를 주었지만 아직까지 '활약하지 않는' 재난영화의 주인공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 사이에선 많은 논쟁을 낳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노잉> 역시 이런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기에 딱 좋은 영화이다. 원래 연기 정말 잘 하는 배우였는데 최근엔 소모적이고 완성도도 실망스러운 오락영화들에 주로 출연하며 히어로스러운 활약을 펼치던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으로 나섰지만 그는 뭐 하나 제대로 활약하는 게 없고 재난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곳곳에서 빵빵 터진다. 그런데 <노잉>은 앞서 언급한 다른 영화들과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단지 재난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범위는 실로 광대하다.
1959년, 미국의 윌리엄 도우즈 초등학교에선 개교 기념 행사로 타임 캡슐을 만들기로 한다. 50년 뒤 세상의 모습을 학생들이 상상해 그려넣은 것을 타임 캡슐 안에 넣어 보관해 50년 뒤에 이 학교를 다닐 학생들이 열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루신다라는 한 소녀는 그림이 아닌 정체불명의 숫자를 종이 가득 빼곡하게 적어넣는다. 이는 타임 캡슐에 그대로 보관되고, 50년 뒤 개교 기념 행사에서 타임 캡슐은 개봉된다. 학교 학생들 중 케일럽(챈들러 캔터베리)이라는 소년이 이 종이를 손에 넣게 되고, 호기심에 케일럽은 이 숫자들을 MIT 천체물리학 교수인 아버지 존(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보여준다. 1년 전 화재로 아내를 잃은 기억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그는 무심결에 분석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수많은 숫자들이 실은 루신다가 그 숫자를 적은 뒤 세월동안 일어날 세계의 숱한 재앙들을 예언한 일종의 '데이타'였던 것. 당장 1959년의 재난부터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존은 그 숫자들의 예측이 정확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거기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재앙에 대한 예측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다름아닌 인류 전체의 멸망에 대한 예언. 이 말도 안되는 진실을 홀로 깨달은 존은 루신다의 딸인 다이애나(로즈 번)와 그녀의 딸 애비를 만나 실마리를 얻으려 하지만, 재앙은 하나하나 그대로 실현되면서 존의 숨통을 조여온다.
일단 이렇게 특정 인물보다 그를 괴롭히는 어떤 현상이 더 중요시되는 재난영화에서 배우의 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물론 고뇌하는 연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니콜라스 케이지는 지구의 운명을 둘러싼 엄청난 비밀을 홀로 알고 있는 지식인의 심경을 특유의 연기 톤으로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이 영화에서 진짜 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재난의 표현방식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지구 멸망의 전조가 하나하나씩 닥친다는 어떻게 보면 매우 구태의연한 설정을 안고 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볼거리를 늘어놓는다기보다 진지한 드라마 속에 재난 장면을 띄엄띄엄 던져놓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등장하는 재난 장면들은 굉장히 파괴적이다. 음향시설과 스크린이 제대로 튼실하게 갖춰져 있는 극장에서라면 그저 입을 살짝 벌어놓고 넋을 놓은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을 장면들이다.
이렇게 이 영화 속 재난 장면들이 유난히 관객들의 넋을 빼놓는 결정적인 이유는 영화가 재난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여태 음악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막상 결정적 재난이 닥치면 음악은 모두 그친 채 영화는 갑작스레 시각을 사로잡는 재앙들을 그저 묵묵히 비출 뿐이다. 들리는 건 분위기 잡는 영화음악이 아니라 사람들이 치이고 구조물들이 붕괴되는 둔탁하고 처참한 효과음들과 아비규환의 비명 뿐이다. 보이는 건 홍해가 갈라지는 듯한 장관이 아니라 질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질서의 절정에 이르는 혼란스런 순간들이다. 장관도 아니고 이 압도적인 '참사'에 보는 이는 그저 멍만 잡을 뿐이다. 긴장감과 공포감은 호러물을 방불케 한다. 이처럼 영화는 재난을 거대한 스크린을 앞에 두고 팔짱을 낀 채 '캬 장관이다' 하고 감탄하게 하는 장면이 아닌, 마치 나 자신도 목격자가 된 듯 섬뜩하고 충격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장면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심리적 쇼크가 보다 현실과 가까워서, 더 파괴력 있게 다가오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적 충격보다 더 우리를 더 멍 잡게 만드는 건 이 영화가 재난과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다. 1차적으로 영화는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재앙 앞에서 인간은 그저 나약한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생각은 기존의 몇몇 재난영화들 또한 보여 온 것인지라 그렇게 낯설지 않다. 주인공 존은 MIT 교수라는 굵직한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높으신 분들과 인연을 맺고 있진 않다. 오히려 은둔형에 가깝다. 때문에 그가 지구 전체의 운명을 쥐고 있는 비밀을 안 뒤에도 그걸 알릴 사람은 동료 교수나 가족 이외에는 딱히 없다. 정부를 설득해 뭔가 거대한 계획을 세우게 부추기기에는 그의 깜냥도 안되고 시간도 촉박하다.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는 한 명이라도 구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그저 속수무책인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탄식이다. 이렇게 영화는 재난영화의 형식을 빌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극한의 상황 앞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인간의 내면을 조명하는 태도를 슬쩍 비춘다.
하지만 영화가 진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만이 아닌 듯하다. 앞서 재난영화의 형식을 '빌렸다'고 했는데,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말처럼 이 영화는 '재난영화'가 아니라 '재난영화의 모양새를 빌린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만큼 영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다 알겠지만 영화는 종교적, 신화적인 색채를 눈에 띄게 띠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이미 예언된 재앙들이 세계를 휩쓸고 인간들은 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이미 훤히 꿰고 있는 외부의 존재가 있다는 이야기의 전개는 우주와 지구의 관계를 떠나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이 지구가 삶의 마지막 보루인 양 필사적으로 생존의 끈을 잡으려 하지만 정작 그 바깥 어딘가에는 이를 마치 어떤 작은 전시물을 보듯 느긋하게 관찰하는 존재가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노잉>은 다른 재난영화들이 '지구 최후의 운명' 운운하며 전지구적인 스케일로 필사의 노력을 펼칠 때, 지구는 그저 태양계에 속한 행성들 중 일부일 뿐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그 작은 땅 덩어리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가뿐히 비웃는다. 전우주적인 스케일로 논다는 얘기다.
이렇게 영화가 갑자기 터무니없이 생각의 스케일을 키우면서 이전까지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이어오던 영화는 갑자기 논란의 중심에 설 소지를 갖는다. 그럴 법하다. 재난영화로 기대하고 왔는데 뜬금없이 SF적인 분위기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고관은 상당히 논란이 될 수 있으면서도 때때로 생각을 한껏 트이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난 이 영화를 보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일련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그의 작품들 속에 일관되게 이어지는 사상은 '인간만이 이 드넓은 세계의 주인공은 아닐 것'이라는 거다. 1~2년 전에 큰 인기를 끈 소설 <파피용>만 봐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15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탑승한 우주선의 이야기 속에서,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고 있는 지구는 크나큰 위기를 맞고 있는 어느 행성, 별다른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그저 관찰될 뿐인 외부의 행성으로 비쳐진다. 최근 국내에 발간된 <신>에서도 이런 사고관은 이어지는데, 인간들의 문명을 무기로 정복과 개척과 전쟁을 마치 게임처럼 벌이는 신 후보생들의 대결을 통해 소설은 '인간은 어쩌면 어떤 거대한 운명에 의해 정해진 길로 향해가는 꼭두각시같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펼쳐보인다. 일견 터무니 없이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런 사고관은 베르베르가 범우주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지적 즐거움과 사유에 빠지게 하는 노련한 작가임을 깨닫게 한다.
이와 유사한 사고관을 <노잉> 또한 펼치고 있는 듯하다. 끊임없이 접근을 시도하는 외부의 존재와 존을 비롯한 인간의 관계는 신과 인간의 신비한 관계를 연상시킨다. 세상만사는 우연의 연속이라는 '무작위론'에서 세상만사는 이미 정해진 대로 이뤄진다는 '결정론'으로 서서히 넘어오는 존의 심경 변화는 인간과 운명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다만 <노잉>은 영화가 갖는 시간적 제약 때문인지 이런 꽤 비약이 심한 사고관을 펼치는 데 좀 애로사항이 있고 그래서 공감하기가 보다 더 어렵다는 약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개미 한 마리가 인간에겐 그저 손가락으로 눌러 죽여도 될 미물이듯, 인간과 지구 또한 외부의 어떤 존재에겐 하찮은 미물일 수도 있다는 암시는 영화를 그저 보고 나면 그뿐인 팝콘 무비에만 머물지 않게 한다. 이런 우주적 고민 끝에 영화의 결말은 꽤나 갑작스러운 내용으로 마무리지어지는데, 난데없이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띠면서 관객들을 적잖이 당황스럽게 한다. (나 역시 살짝 당황하긴 했으나 그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고로 얘기한다면 이런 결말의 분위기는 생뚱맞은 게 아니라 감독의 기존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작품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하고 분위기도 가장 밝은 편인 <아이, 로봇>의 결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는 걸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알 것이다.
막상 이야기하고 보니 이렇게 이야기할 게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는 재난영화는 또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볼거리가 튼실하게 자리잡고 있는 영화로써 그저 즐기자고 이 영화를 봐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노잉>은 그렇게 보고 끝나기에는 굉장히 꺼림직한 구석이 많다. 여기서 '꺼림직하다'는 표현은 본 사람들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계속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생각하게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영화가 펼쳐놓는 온갖 생각들은 그 내용이 워낙에 대담하고 한편으론 위험하기까지 한지라 그냥 헛소리처럼 치부한다면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한 즐거움 중 하나를 놓치는 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고 그런 재난영화의 컨셉트에서 출발해 급기야 인간과 우주를 둘러싼 철학적, 신화적, 종교적 질문에까지 다다르는 영화 <노잉>은 분명 걸작은 아니지만 생각해 볼 만한 재난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재난영화가 생각해 볼 만하다는 건 꽤나 특별한 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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