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마음을 울리는 구나....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08년 말부터 연이어 들려오는 각종 국제영화제 수상 소식. 언젠가 TV 뉴스에서 아리따운 여자 아나운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똥파리> 수상 소식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결론적으로 말해 영화 <똥파리>는 최근 봤던 그 어떤 영화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폭발력이 강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끝내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진한 페이소스를 담고 있다.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 ‘모든 장면에 다이너마이트가 장착되어 있다’. 그런데 그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사람이 다치는 게 아니라 눈물이 흐른다.)
주인공인 상훈(양익준)의 소개 장면을 보자. 한 남자가 거리에서 여자에게 욕을 해대며 폭행을 하고 있다. 이 때 다른 남자의 어깨가 앵글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여자를 폭행하던 남자를 두들겨 팬다. ‘아... 이 남자는 거리에서 맞는 여자를 구해주는 용감한 시민, 영웅인가?’ 이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그 남자는 여자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따귀를 올려붙인다. “왜 맞고 다니냐...” 이번엔 상훈과 연희(김꽃비)가 만나는 장면을 보자. 상훈이 뱉은 침이 연희의 얼굴과 옷에 묻는다. 사실 상훈이 일부러 겨냥하고 침을 뱉은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맞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달려드는 연희를 때리는 상훈. 한 동안 기절해 있던 연희는 일어나자마자 상훈에게 대거리를 하고 둘은 맥주를 마시고 헤어진다.
인물의 소개 장면 자체가 대단히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똥파리>는 대화의 90% 정도가 욕일 정도로 시종일관 “씨발놈”이라는 욕설이 극장 안을 가득 채운다. 외국 영화제에서 상영한 뒤 관객이 양익준 감독의 얼굴을 보며 “씨발놈”이라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던가. 앞의 두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상훈은 적군과 아군, 나쁜 놈과 도와줘야 할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쌩양아치다. 거기에 그의 소통 방식은 욕과 폭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가 침을 뱉는다는 건 불쌍하다거나 맘에 든다는 의사표현일 수 있다. 그는 배다른 누나에게도 쌍욕을 해대고,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의 배를 냅다 걷어찰 정도로 폭력적이다.
영화 속 인물들, 정확하게 남성들은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이 영화는 결국 폭력의 전염, 유전, 확산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훈이 아버지를 향해 욕을 해대고 무자비한 구타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이후로 관객의 입장은 묘해진다. 영화는 내내 욕설과 구타, 폭력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상훈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할수록 보는 관객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하긴 좀 어렵다. 그게 연민의 눈물인지, 동정의 눈물인지, 비극적인 주인공의 결말이 예상되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가족들조차 기피하는 똥파리 상훈이 더 이상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주요하게 두 집안의 폭력사를 보여준다.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로 인해 여동생과 어머니를 잃은 상훈네, 그리고 월남 참전 용사인 무능력한 아버지와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포장마차를 하다 강제 철거 과정에서 어머니가 죽은 연희네. 누군가의 죽음으로 폭력이 단절될 수도 있지만, 두 집안의 경우엔 어머니가 죽음으로서 가정 내 폭력은 이상한 정당성을 얻게 된다. 우리는 연희네 집안의 폭력을 접하면서 연희가 어째서 상훈의 폭력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즉, 연희는 폭력의 피해자로서 이미 내성이 생긴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폭력을 주로 행사하는 주체인 연희 아버지가 월남 참전 용사였고, 상훈과 연희의 동생 영재(이환)가 용역업체 깡패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 폭력성의 근원이 개인적인 인성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국가에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 지금까지 국가에 의한 폭력은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국가의 폭력은 좀 더 세련되어 졌을 뿐 본질은 변함없다.(물론 최근에 들어와선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 노골적이고 거칠어졌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 사회의 많은 언론과 소위 지식인들이 국가에 의한 제도적 폭력엔 애써 눈감으면서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외형적 폭력에 대해선 엄격한 처벌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90년대 중반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적준’이란 회사가 유명세를 떨친 적이 있다. 주로 재개발ㆍ재건축 현장에서 철거를 담당했던 그 업체가 투입된 곳은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돌변했고, 심지어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그 업체가 처벌되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용역=깡패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 것도 그 회사 때문인데, 철거 용역 자체가 일정 시간 내에 완수하면 금액의 100%를, 시간을 넘기게 되면 깎이는 것으로 계약되어 있어서 철거 업체로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철거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현장에선 용역업체와 경찰 간의 유기적 협조 아래 철거가 진행되었으며,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업체 직원들은 소위 ‘행정대집행’이란 명목 하에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아닌가? 그렇게 악명을 떨치던 철거 현장에서의 폭력은 여론이 악화되면서(거대한 등빨의 사내가 팬티만 입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여성들을 위협하던 그 유명한 사진, 영화 <귀여워>에서 정재영이 선보인 바로 그 장면), 그리고 나름 한국 사회의 성장에 따라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듯 보였다. 그런데 2009년 용산에서 확인하게 된 것은 여전히 그런 원초적 폭력이 21세기 서울 하늘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국가와 제도의 보호 속에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훈이 유일하게 마음을 두고 있는 대상은 조카 형인(김희수)인데, 그 형인에게조차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상훈은 연희과 연애 비스무리한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소통 방식에 조금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나에겐 이러한 과정을 담은 두 가지 장면이 대단히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첫 번째, 자신이 좋아하는 고삐리 여고생의 이름이 한연희임을 알게 된 상훈(영화에서 유일하게 상훈이 마음껏 웃는다)은 새로 들어온 신입의 이름이 한영재라고 하자, “너도 한씨냐?”라며 은근슬쩍 관심을 표시한다. 그러니깐 영재의 성이 연희과 같은 성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친밀감이 솟구친 것이다. 아마도 나는 상훈이 그런 자신의 관심에 스스로도 놀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상훈이 연희, 형인과 함께 용산에 가서 플스도 사고, 떡볶이도 사먹으면서 나름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 다른 장면이 연출된 영화처럼(말 그대로) 촬영됐다면 상훈이 가장 행복했었을 그 장면은 마치 누군가 멀리서 숨어 지켜보듯이, 촬영되고 있다. 의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산의 문제로 군중을 통제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숨어서 지켜보는 느낌, 그리고 흔들리는 카메라는 상훈에게는 결코 그가 바라는 안락한 행복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경고를 담은 것으로 느껴진다.
특히 영화 <똥파리>의 마지막 부분은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미치도록 절절한 느낌을 전달한다. 상훈은 과거와 단절하기로 마음먹은 그 날, 파국을 맞이한다.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상훈은 피투성이가 된 채 “나를 데리고 가...” 달라는 얘기를 한다. 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데리고 가달라는 말일까. 그는 연희 곁으로 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잠깐 눈에 비친 엄마와 여동생이 노는 곳으로 가고 싶었을까? 전자였다면 그건 “살고 싶다”는 말이었을 것이고, 후자였다면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환영에 의하자면 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훈의 죽음으로 비로소 유사 가족은 완성되고 겉으로 보기엔 행복한 가정이 완성된다. 이제 형인에게 폭력을 계승할 존재는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니깐 이들의 행복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의 행복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깐 상훈은 연희의 집안 사정을 모르고, 연희도 상훈의 집안 사정을 모른다. 서로가 얘기하지 않는다. 상훈은 영재가 연희의 동생인지 모르고, 연희는 상훈과 영재가 같은 직장에 있는지 모른다. 연희는 상훈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머니의 죽음에 상훈이 관여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상훈의 누나는 상훈이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즉, 영화에 출연한 인물들의 관계는 관객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알려지는 순간 파국이 찾아오는 불안한 관계 위에 이들은 서 있다. 상훈의 죽음으로 이들이 서로의 과거사를 알아야 할 이유는 없어졌다. 즉, 이들은 행복한 유사 가족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영재라는 존재의 파괴력을 제외한다면. 그런 차원에서 연희가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상훈과 영재의 모습이 겹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하나가 되는 그 장면은 연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이 여전히 날선 폭력에 의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폭력은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고 있는 것이며 이들에게 행복은 쉽게 보장되지 않는다.
※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상훈이 아버지, 누나, 형인이 방에서 다정하게 플스를 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장면 이후 아버지가 자살을 기도하고 상훈이 울부짖는다. 그리고 상훈은 형인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형인은 그런 상훈에게 ‘할아버지 때리자 말라’고 소리친다. 뭔가 이상하다. 그러니깐 셋이 플스를 하는 장면 이후에 상훈이 누나와 형인 앞에서 아버지를 패는 장면이 있었을 것이고 편집 과정에서 빠진 것이다. 뺄 것이라면 상훈과 형인의 대화 장면도 뺏어야 했을 텐데, 앞 장면은 빼놓고 뒷 장면은 살려 놓았다. 무슨 의미일까. 예상하자면 그 상태에서 아버지를 패는 장면은 아무리 자연스러운 진행이긴 해도(나는 상훈이 창문으로 셋의 모습을 보고는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 장면이 없어서 좀 의아했다) 상훈이 가장 아끼는 형인 앞에서의 폭력이란 점에서 걸러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뒷 장면은 상훈이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말로서 상훈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남겨진 것 같다.
※ 처음 이 영화를 압구정 CGV에 예매했다가 갑자기 당일 일이 생기는 바람에 후배에게 표를 넘겼다. 다시 예매하려는데 어디가 좋을까 보다가 왕십리 CGV로 예매했다. 이유는 단 하나. 왠지 왕십리와 똥파리는 어울리는 한 쌍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왕십리랑 가까웠는데, 당시 왕십리에 사는 친구의 별명은 왕십리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왕십리 똥파리였다. 왜 왕십리 똥파리가 일종의 고유 명사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심지어 왕십리엔 리파똥(똥파리 거꾸로)이라는 큰 호프집도 있다.
※ 우리나라의 독립 영화는 연출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조연이나 단역의 연기로 인해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똥파리>는 출연배우들 거의 대부분이 안정적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여기엔 정인기라는 나름 이름 있는 배우가 지극히 소소한 단역에 출연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감독이 배우 출신인 게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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