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론이 바탕이되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렇듯 보는이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몇 년전에 땅바닥에 선을 긋고 내가 여길 넘어갈지 안넘어갈지 한참동안 고민했던적이 있는데요. 과연 내가 이 선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할것인지 이미 정해져 있는것일까 궁금했던 겁니다.
이대로라면 이 빌어먹을 결정론이 인류에 끼칠 수 있는 해악은 무궁무진합니다. 연쇄살인이나 강간,방화같은 온갖 범죄들의 합리화까지도 가능해요. 이미 태초부터 결졍된 일이라면 죄의식같은건 개나줘버리라고 할 수 있는겁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보이지않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고(이를 어쩌나 그 자살도 정해져있는거라면) 살기 힘들어 생과사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이론이 바로 결정론인것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의 궤변이기도 해요. 저도 허무주의를 품고있는 사람이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한켠에 허무함에 대한 울적함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결정론같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가설들은 건조한 일상에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허나 이정도에만 머물러야 적당하겠습니다. 결정론 같은 밑도 끝도 없는 가설들은 그것이 증명될 수 없는한 그저 이성의 오만함과 사고의 방탕함일뿐이니까요.
살인동기가 없어지고 있어요. 그냥 죽입니다. 모기가 윙윙대는것처럼 거슬리니까 죽였데요. 왜 거슬렸나요? "그냥" 우리는 이미 이유와 근원이 결여돼 가는 세상 한복판에 서있습니다. 도덕과 죄의식만으론 더이상 누군가를 통제할 수 없어요. 내앞에 닥치기전까진 이 심각성이 와닿지 않겠지만 언제든 누군가 아무 이유없이 나와 내 가족들한테 칼부림을 해도 이상할게 없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대중매체가 논란이 되는 가설들을 아무런 틀없이 돈다발 쏟아부어서 흥미롭게 펼쳐보이면 장땡일까요? 누군가는 비약일뿐이라고 생각하겠죠. "누가 영화보고 그런생각을 하냐?" 그렇죠. 영화보고 당장에 생각지도 않은 자살하러 가거나 살인하러 가진 않을거에요.
다만 무의식속에 축적이 된다는 겁니다. 현재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그런 것들의 기로에 놓이게 될 사람들이 건너갈지 말지에 대해 선택해야되는 상황에 이를때 이 흥미롭지만 대수롭진않을것 같았던 가설이 그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걸 분명히 인지해야 될거에요.
2시간동안 영화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충만합니다. 볼거리가 많은건 아니지만 임팩트가 강하고 현장감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7,8천원주고 뇌사우나 한번 시켜주는것도 나쁘진않아요.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면 뇌가 고장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평점을 높게 줄 수 없는건 소재를 좀 더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이고 이는 결정론으로 초래되는 부작용에 대해 고민한 일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저 재난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장면 하나뿐이랄까요.
판단은 각자 알아서들 하시고 보게된다면 꼭 영화관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불법다운로드는 범죄입니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거의 망각한채로 살아가죠. 이런 부분들이 제가 노잉같은 "틀"없이 만들어지는 매체들에 대해 우려를 느끼는 무의식적 심각성이기도 합니다.
싸이코패스를 가장한 겁쟁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불법다운로드 하는 사람들중에 식당에서 5천짜리 밥먹고 500원만 주고 나오면서 밥맛이 500원짜리밖에 아니었어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을테니 말이에요.
Knowing - 2009
ps. 몇 년전 땅바닥 선긋기 놀이에서 제가 선을 넘을지 안넘을지 알것 같은 어떤 존재에게 계속 "내가 이 선을 넘을까 안넘을까? 당신이 선을 넘을거라고 결정지었다면 난 지금 이 선을 안넘을테니 운명을 내 힘으로 바꾼건가?" 라는 식의 끊임없는 말장난을 했던게 생각납니다.
결국엔 그냥 선을 밟아서 지워버렸어요. 물론 결정론에 따르면 선을 밟아서 지워버렸다는것도 결정되어있었겠죠.
허나 문득 떠오른건 이 우주만물의 모든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 모든걸 지켜보는 입장에 있는 존재는 얼마나 지루할까요? 밑도 끝도 없는 가설에 밑도 끝도 없는 반론이었습니다.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