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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모두가 웃는 전쟁 썸머 워즈
jimmani 2009-08-14 오후 12:33:58 1634   [0]
 
2007년 우리나라에 개봉한 재패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장편 재패니메이션 분야가 슬슬 지루해질 때 쯤 등장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판타지 또는 SF 장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재패니메이션들이 이 장르들에서 좀처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시이 마모루 같은 익숙한 거장의 작품이 아니면 기대할 게 많지 않은 식상한 분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특히 그 많은 재패니메이션들 중에서도 국내에선 '엄선된' 일부만 정식으로 선보이다 보니 선택의 폭은 더 좁아진다.) 그 와중에 호소다 마모루라는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닌 감독인 내놓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재패니메이션이 한동안 겪고 있는 듯 했던 매너리즘을 단박에 깰 만한 작품이었다. 현실을 판타지 뒤에 숨겨놓지 않고 현실과 판타지를 평행선 위에 연결해놓은 이 영화의 구조는, 그렇기에 판타지답게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면서도 리얼리티 드라마로서 가슴 먹먹한 현실감까지 놓치지 않았었다. 사춘기의 10대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사춘기의 10대가 보여주는 성장기의 희노애락은 더욱 진실되게 다가왔다.
 
이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던 감독이 3년 만에 신작을 들고 나왔다는데, 이 기대감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썸머 워즈>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는, <스타 워즈>를 연상시키는 제목만 봐서는 전형적인 일본식 SF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지만 역시나 영화는 결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현실과 판타지 세계를 대등하게 이어놓은 세계관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는, 판타지가 주는 짜릿함과 흥분감과 현실이 안겨주는 기쁨과 슬픔이 모두 담겨져 있다. 여기에 이 영화는 그 적용 범위가 10대 아이들에서 그치지 않는 연령대를 초월한 가족, 나아가 전 인류로 뻗어나간다.
 
현재 전 세계의 네트워크는 '오즈'라는 거대한 가상현실 커뮤니티가 지배하고 있다. '오즈'는 사람들이 아바타를 매개체로 인터넷, 휴대전화를 이용해 쇼핑, 문화생활, 게임 등을 즐길 수 있으며 심지어 민원이나 군사 시설, 공공 서비스의 작동도 아바타를 통해 조정할 수 있을 만큼 '오즈'의 영향력은 막강하고 단단하다. 수학 올림피아드 국가대표로 나갈 뻔 했을 만큼 수학 실력이 뛰어난 고등학생 겐지는 이 '오즈'에서 보안 점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퀸카 선배 나츠키가 겐지에게 4일 간의 아르바이트라며 할머니댁으로 가는 길에 함께 해 줄 것을 부탁한다. 덥석 부탁을 받아들인 겐지는 이내 할머니댁에 도착한 후 자신이 나츠키의 남자친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난감해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겐지에게 의문의 문자가 날아오고 겐지는 그 문자를 수학 문제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이것이 대혼란의 씨앗일 줄이야. 이내 오즈는 어느 해킹 아바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의 아바타 정보가 빼앗기고, 이를 이용해 일본 곳곳의 공공서비스가 마비되고, 나아가 거대 테러에 맞먹는 일까지 벌어지려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간밤의 문자로 인해 겐지가 억울하게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만다. 누명도 벗고 혼란도 막기 위해 겐지는 안간힘을 쓰지만, 가족들은 할머니 생신 준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 사건을 계기로, 겐지와 나츠키, 그리고 나츠키의 가족들은 이 혼란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함을 깨닫는다. 이제 한가로운 여름날 시골 집에서, 세계의 운명을 건 전쟁이 시작된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3D 애니메이션이 거스를 수 없는 트렌드가 되었다지만, 이 영화는 아직까지 외면할 수 없는 셀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매력이란 바로 빈틈없는 섬세함과 따스함이다. 시작부터 보여주는 오즈의 전반적인 풍경은 사이버 커뮤니티라 지극히 추상적인 듯 하면서도 곳곳에 나부끼는 수백, 수천만가지 캐릭터들의 모두 다른 모습이나 각 분야에서 펼쳐지는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들이 시각화되면서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이 영화가 비록 '가상세계의 전쟁'이라는 꽤 비현실적인 소재를 담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이 소재만 빼면 상당한 리얼리티를 지닌 영화다.
 
이런 사실적인 매력은 그림이 가상 세계와 반대되는 현재에도 엄연히 존재할 시골의 구수한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부터 두드러진다. 겐지와 나츠키가 기차와 버스를 타고 할머니댁으로 향하는 과정, 할머니 댁 안에서 펼쳐지는 가족들끼리의 소소한 일상을 표현한 부분은 실사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실적이다. 주가 되는 몇몇 캐릭터들에게만 신경을 쓰지 않고 주변에 있는 모든 인물과 배경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은 듯한 느낌이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휘청거리며 닌텐도 DS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들, 가족들이 다 모인 식사 시간의 부산함) 실제 배우들을 촬영한 영상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덧입힌 '로토스코핑' 기법을 활용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리얼리티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러한 배경 묘사의 리얼리티는 곧 캐릭터 묘사의 리얼리티로 이어진다. 인물들의 표정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되고 단순화된 그림체가 빈번히 사용되긴 하지만, 인물들의 성격 자체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실사 드라마 못지 않게 다양하고 현실적이다. 수학 실력은 출중하지만 소심함이 줄줄 흐르는 겐지, 씩씩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할머니를 사랑하는 나츠키, 용기와 자상함과 근엄함을 겸비한 나츠키 네 가족의 정신적 지주인 할머니, 사이버 세계에서의 영향력을 곧 현실 속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 사촌동생 카즈마, 할머니의 친자식이 아니라 가족과 겉돌면서도 사실 누구 못지 않게 가족을 그리워했던 와비스케 삼촌, 늘 집안의 전쟁 무용담을 입에 달고 사는 다혈질 할아버지 등 대가족답게 각자의 뚜렷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이들의 캐릭터는 행동을 통해서도 구체화되는데, 쉽게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길 잘 하는 겐지의 모습, 슬퍼 하는 나츠키와 겐지가 손을 맞잡는 장면(둘은 손을 얹다가 나중에 깍지를 끼는데, 이는 '손을 잡을 때 깍지를 끼는 사람은 상대방과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듯 했다. 그저 놀라웠다.)은 애니메이션에선 좀체 보기 힘들었던 인간 감정의 극도로 세밀한 묘사의 결과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가 대등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독의 전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비해서는 판타지 세계의 비중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장르적 재미가 한층 더 강해진 인상이다. 더구나 '한 소녀의 시간여행'을 소재로 했던 전작과 달리 '세계를 건 사이버 전쟁'을 소재로 한 만큼 규모 면에서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만큼 감성적으로 여운을 주기 이전에 말초적 재미도 단단히 한 몫한다는 얘기다. 앞서 얘기한 사실적인 캐릭터와 세계관 구축을 바탕으로 영화는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오가며 펼쳐지는 거대한 전쟁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현실 세계에서 인물들이 땀 삐질삐질 흘리며 겪는 긴장감은 곧바로 가상 세계에서의 숨쉴 틈 없는 결전으로 이어지는데, 공간 상의 아무런 제약이 없는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들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갖가지 대결은 손에 땀을 쥐게 하기 충분하다. 격투게임같은 일 대 일 격투나 추격전, 여러 캐릭터가 합체해 펼치는 협동전과 같은 여느 일본식 SF물이 주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데다 클라이맥스에 가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하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대결 방식이 등장해 장르적 재미를 한층 배가시킨다.
 
하지만 호소다 마모루가 진정 재패니메이션의 차세대 실력파로 인정받는 것은 이러한 장르적 재미에 충실한 것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지극히 판타지적인 소재로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시치미 뚝 떼고 전개시켜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 능력을 지닌 소녀에게서 '후회보다는 가능성이 더 많이 존재할 사춘기의 희망'을 발견할 줄 미처 알지 못했듯이 말이다. <썸머 워즈> 역시 장르적 재미 내면에 숨겨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 봤을 고민이 풋풋한 시선으로 담겨 있다. 이번 영화도 고등학생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가족들의 일상이 중요한 비중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여기선 고민이 10대 소년의 시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갖고 있는 힘, 세대 간의 이해,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 상호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세계관을 장악하는 오즈는 어떻게 보면 가족 또는 친구 형태의 인간 관계가 극도로 확장된 모습이라 해도 무방하다. 어느 한 곳에서 생긴 부정적 균열이 곧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곧 전체가 마비되기에 이르는 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 집단에서 겪는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때, 이것을 남의 일이라고 외면할 수 없고 비록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더라도 결국 나에게 까지 그 정서적 영향력이 미치듯이 말이다. 오즈의 붕괴를 둘러싸고 처음엔 겐지와 카즈마만 안간힘을 쓰다 나중에 나츠키 네 가족 전체까지 합세해 전투를 벌이는 과정은 가족들이 이러한 인간 관계의 속성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즈의 혼란은 나와 아무런 상관없다고 여기던 가족들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아간다. 이를 통해 가족들은 부분적 갈등이 생긴다 해도 그것은 결코 그 부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멀리 있는 우리들까지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요즘이 개인주의 사회라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 한 켠에서 갈등이 생길 때 그것은 내가 직접 개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가족들 간이라면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갈등을 표현하면서도 이것을 냉정하게 관찰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껴안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핏줄이 섞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환경 속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똑같은 유대감을 느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평소 일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 외로움을 느꼈던 겐지가 나츠키네 집에서 느끼는 가족애나, 할아버지 첩의 자식이라고 가족들로부터 따가운 눈총만 받아온 와비스케가 그래도 가족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연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긍정적 영향력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부분적인 균열 때문에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느 한 곳에서라도 그 애정이 식지 않는다면 곧 그 애정은 전체로 퍼져 나가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가족의 긍정적 힘은 이 가족만을 단단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 전체를, 나아가 세계 전체를 지키는 데까지 힘을 발휘한다. 가족애가 나아가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로 나아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범국제적인 '뻥'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품고 있는 활기찬 에너지 속에서 발생하는 만큼 얼토당토않는다는 느낌보다 이건 어떤 거대한 긍정의 메시지구나 하는 뿌듯한 느낌을 더 강하게 안겨준다.
 
영화 속에서 겐지와 나츠키 가족은 불의를 상대로 가족애와 인류애를 무기로 거대한 전쟁을 벌인다. 전쟁은 보통 지구상에 결코 있어서는 안될 절대악으로 일컬어지지만, 이 영화 속 전쟁은 예외인 듯 하다. 불의의 상대는 인간이 아닌 바이러스에 가깝고, 맞서는 이들은 승리를 위해 인명 피해를 담보로 하지도 않는다. 악인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인류애의 구현을 향해 서로를 격려하며 다함께 뛰어드는 용감하고 따뜻한 선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이 이 전쟁을 통해 깨달아가는 건, 비참한 전쟁의 폐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긍정적 에너지만 있다면 세계까지 구할 힘도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이다. 희망을 핵으로 구성한 가족애와 인간애라는 무기로 벌이는, 울상 짓는 이 하나 없이 마지막에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전쟁.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이번에 발견한 건 이렇게 훈훈한 전쟁도 있을 수 있다는, 대책없는 듯 하지만 그 진심이 어딘지 뿌듯하게 느껴지는 낙천주의다.

(총 2명 참여)
zoophi
저도 보고싶네요   
2010-01-22 21:33
kyi1978
ㄳ   
2009-11-05 11:27
khjhero
마지막...암산...외칠때 배꼽 빠지는줄 알았음..ㅋㅋ   
2009-08-17 15:53
boksh2
대단하시네요   
2009-08-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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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워즈(2009, Summer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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