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아픔을 어루만져 준다는 것....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허진호가 아닌 다른 감독이 <호우시절>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면 과연 영화화가 쉬웠을까 싶게 <호우시절>의 스토리 전개는 다분히 전형적이다. 건설 중장비 회사의 팀장인 박동하(정우성)는 동료 대신 가게 된 중국 출장 첫날에 관광 가이드를 하고 있는 미국 유학 시절 친구인 메이(고원원)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둘은 두보 초당과 거리를 거닐며 둘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둘의 기억은 엇갈린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리는 동하와 메이. 이 둘은 오랜 시간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언뜻 이 영화는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연인이 과거의 기억을 조합해 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은 곧 현재의 사랑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둘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가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어 남아 있다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호우시절>의 그러한 설정은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호우시절>은 정리하자면 누군가의 아픔을 보듬어 어루만지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런 로맨스 영화에 무슨 스포일러이냐 하겠지만, <호우시절>이 스촨성, 즉 사천성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은 <호우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래서인지 영화의 시놉시스에 스촨성-사천성이라는 지명이 거론되지 않는다) 중국 지사장(김상호)은 스촨성의 4대 명물 - 미녀, 음식, 술, 판다 - 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 4대 명물은 영화의 이곳저곳에서 동하와 메이의 이야기를 만들어주며, 화면의 공간을 채워준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스촨 미녀, 즉 고원원이다. 스촨성의 성도인 청두의 이곳저것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은 어찌 보면 <비포 선라이즈>의 허진호 버전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4대 명물 말고도 스촨성하면 떠오르는 또 한 가지가 있다. 그건 2008년 5월에 발생해 수만의 목숨을 앗아간 스촨성 대지진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거나 또는 죽음으로 향해 간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또는 누군가가 죽음으로서 결론이 나기도 한다. 허진호 감독의 연인들이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 <호우시절>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 부분이 스포일러이면서도 한편으로 이야기 전개가 대단히 전형적이라고 한 이유는 영화 초반에 향후 이야기의 전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훤히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동하가 스촨성 지진 현장을 찾았을 때, 어떻게든 지진이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걸 눈치 채기란 쉽다. 그리고 동하가 메이에게 지진 얘기를 꺼냈을 때 메이의 미묘한 표정 변화는 그녀에게 지진과 결부된 상처가 있으리란 짐작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 전개는 정말 길 위에 줄을 그어 놓고 따라가는 것처럼 예상 가능한 길로만 걸어간다. 충분히 화면으로 설명해 놓고도 굳이 말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져 메이가 이제 그만 일어나야 된다고 말하자 동하는 커피 한 잔을 더 시킨다. 이는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고, 메이와 관객이 그러한 동하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커피숍에서 나와 동하는 “하루 더 있다 갈까?”라고 말함으로서 스스로가 만든 영화적 여백을 가차 없이 날려 버린다.
“허진호 영화가 대체로 뻔한 스토리이지 않냐”라고 말한다면 그런 지적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 보면 허진호 영화는 뻔한 스토리를 아름답게 재구성해내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호우시절>은 뻔한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기인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가슴이 아련해지는 경험을 선사한다. 지진 현장에서 카메라는 누군가가 신었을 신발, 누군가의 옷, 누군가의 공책의 파편들을 아련하게 담아내고, 끝내는 아픈 상처를 보듬어 어루만져 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스촨성 대지진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힘들어 하고 있을 사람들을 위한 위무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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