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의 욕망...★★★★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대의 택시가 짙은 안개에 쌓인 파주로 들어간다. 그 택시엔 재개발을 통해 재산 증식의 욕망에 불을 붙인 조직의 보스(이경영)와 형부와의 사랑이라는 이루어지기 힘든 욕망으로 떠났던 은모(서우)가 동승하고 있다. 보스는 욕망이 꿈틀대는 파주를 상징하듯 화려한 나이트클럽에서 내리고, 은모는 처참하게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 재개발 현장에 내린다. 은모는 그곳에서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형부 중식(이선균)을 만난다.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7년 전 연대사태로 수배 중이었던 중식은 파주로 숨어들게 되고 은모의 언니인 은수(심이영)와 결혼한다. 돈을 벌겠다며 은모가 가출한 사이에 가스폭발 사고로 은수가 사망하고, 형부와 처제는 3년간 같은 집에서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중식이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당국에 검거되어 유치장에 수감된 사이, 은모는 훌쩍 인도로 여행을 떠났고, 3년이 지난 현재 파주로 돌아온 것이다.
왜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 된 것일까? 아니 왜 파주여야 했던 것일까? 어떤 평론가는 <밀양>이 굳이 밀양일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파주>도 굳이 파주가 아니어도 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가? 나는 생각이 다르다. <밀양>의 경우만 보더라도 Secret Sunshine이라는 원제가 말해주듯 영화의 배경이 밀양일 이유는 충분히 있다. <초록 물고기>의 배경이 일산이어야 했던 것처럼 <파주> 역시 파주여야 한다. 한석규가 제대하고 돌아온 일산은 이미 다정했던 이웃이 살던 고향이 아니라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렸다. 개발의 파고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만이 득시글대는 정글만이 남아 있다. 파주는 더욱 적나라하다. 파주는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쫓겨나지 않으려는 또는 생존권을 보장 받으려는 세입자들과 철거깡패들의 대결이 되풀이되고, 사람들은 다치고 쓰러진다. 수도권의 개발 열풍은 이제 파주까지도 집어 삼키고 있는 것이다. 왜 파주여야 하는가? 그곳은 현재 인간의 욕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분출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파주를 대체할 다른 지역을 찾을 수는 있다. 하긴 대한민국 전역에서 개발의 광풍을 불어 넣으려 하고 있는 MB 정권에서라면 대한민국 어느 곳이나 파주일 것이다. 그럼에도 <밀양>처럼 <파주>역시 도시의 어감에서 오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한다.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파격적 사랑의 파(破), 그리고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수는 파괴의 파(破). 그래서 파주다.
이렇듯 영화 <파주>엔 큰 차원에서의 두 가지 욕망이 넘실댄다. 하나는 재산 축적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라는 욕망이다. 둘 모두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재개발은 기존에 살던 주민을 쫓아내고서야 가능한 개발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재개발만큼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을 위한 개발이 아닌 재산 증식과 축적만을 위한 재개발에서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는다. 행정대집행을 근거로 깡패들은 중장비를 앞세워 폭력으로 주민들을 쫓아내고 주민들은 높은 곳에 망루를 짓고 돌과 화염병으로 맞선다. 공권력도 이들의 편이 아니며, 하물며 파주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언론도 별 관심이 없다. 결국 이들은 죽거나 밀려날 것이다. 이들이 밀려난 자리엔 래미안, 자이, 힐스테이트, 이편한세상 같은 대기업의 그럴싸한 아파트 브랜드만이 남게 될 것이다.
중식과 은모의 사랑은 언니의 죽음이라는 희생 위에서 더욱 요동친다. 두려워 떠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그 곳에 존재한다.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상대방을 잊기 위해, 또는 욕망이 현실화되는 것이 두려워 피하고 도망친다.
그런데 사실 <파주>는 생각만큼 어렵거나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너무 흔한 이야기고, 단순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파주>의 이미지는 대단히 복잡하고 모호한 것으로 각인된다. 그건 아마도 파주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안개의 이미지일 것이며,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의 복잡함과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파주>는 대단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박찬옥 감독의 문학 소녀적 취향(실제 그런지는 모른다)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난 <파주>를 보면서 종교 영화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중식에겐 원죄가 있다. 수배 중이던 중식은 선배의 아내와 성관계를 가지게 되고, 그 사이에 어린 아들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화상을 입는다. 영화는 아이가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노출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다.(그리고 그것을 중식이 본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중식은 파주로 도망치듯 떠나온다. 그런데 중식은 또 다시 사랑하지 않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왜? 개인의 욕망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으려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다. 아내와의 섹스를 거부하던 중식은 술에 취한 채 섹스를 하게 되고, 아내의 등에 남겨진 화상자국을 보고는 “용서해 주세요”라며 신음한다.
십계명의 하나인 ‘남의 아내(여자)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중식에게 영화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상황을 계속 전가시키고, 안긴다. 아내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게 하고, 그 죽음의 진실을 알게 한다. 연행을 당하고, 철거투쟁을 주도하게 하며, 사랑하는 이로부터 보험사기로 고소까지 당한다. 그럼에도 중식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마치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도 되는 냥 선선히 받아들인다. 그가 걱정하는 건 오로지 하나, 은모에 대한 것뿐이다. 어쩌면 중식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을 하냐는 은모의 질문에 “처음엔 멋있어서, 그러다 내가 갚아야 할 게 많아서, 그런데 지금은 그냥 할 일이 계속 생기네”라고 답하고, 스승의 날에 하얀 옷을 입고 장난 친 학생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아닐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도시, 파주. 왜 은모는 3년 전엔 중식을 떠났고, 지금은 중식을 보험사기로 고소했을까?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라고 은모에게 고백한 중식처럼 은모 역시 마찬가지의 대답을 내 놓을 것이다. 중식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아내 사이에서 힘들어했다면, 은모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언니 사이에서 힘들어했다. 언니의 사망은 은모의 욕망이 꿈틀대던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마도 은모는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해도 자신의 욕망과 언니의 죽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생각, 아니 추측은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은모는 다시금 꿈틀거리는 욕망의 표출과 욕망의 현실화가 두려워 떠났고, 지금 떠나려 하는 것이다.
※ “너는 왜 형부라고 안 하니?”라고 하자 “아줌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라고 대답하는 은모. 형부라는 호칭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은모가 철거투쟁 현장을 찾아 “형부”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은모의 마음이 정리됐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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