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경험은 할리우드나 홍콩, 충무로에서 만드는 정통 영화 이전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저예산 아동물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아마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들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보면 도저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 때는 뭐가 그리도 좋았는지, 아마도 주인공들의 신기한 활약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영구, 맹구 등 이미 클래식이 된 코미디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프랜차이즈'에서부터 익히 알려진 전래 동화나 유명 캐릭터가 짬뽕으로, 그것도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실사로 등장하는 영화들을 비디오를 통해 즐겨보고는 했었다. 현실에서는 절대 만끽할 수 없는, 내가 상상한 대로 여러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마구 뒤섞인 모습. 아마도 그런 것을 어릴 때부터 내심 즐기며 봐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재미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미를 느낄 만한 게 아니었나 싶다. 비록 조악해 보인다 할지라도, 넘치는 익살과 유머로 신나는 난장판을 즐기는 것 말이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21세기 들어 그것도 충무로 한복판에서 이와 상당히 유사한 재미를 지닌 영화가 나타났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본 숱한 아동물처럼 캐릭터의 인기를 등에 업고 시시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1급 감독과 1급 배우와 1급 제작진들이 모여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여 만든 '블록버스터'다. <전우치>는 사실 표방하고 있는 '한국형 히어로 무비'라는 슬로건을 생각해 보면 여느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처럼 멋진 비주얼을 지닌 영웅이 펼치는 활약상을 매끈하고 멋있게 보여주는 영화가 될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히어로 무비'라는 부분이 아니라 '한국형'이라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잘 빠지고 질서정연한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멀다. 굳이 격식 차리지 않는, 그저 넘치는 신명을 수라상처럼 한가득 차려놓은 마당놀이와 같은 영화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요괴들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이 오히려 요괴의 손에 넘어가자 요괴들이 세상 곳곳에 풀려나 기승을 부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선들(송영창, 김상호, 주진모)은 당대 최고의 도사인 화담(김윤석)에게 요괴들을 봉인하고 피리를 맡아줄 것을 의뢰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온갖 말썽을 부리며 도술을 뽐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자칭 '도사' 전우치(강동원). 마구 날뛰는 놈의 싹을 아주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한 화담은 전우치를 찾아 나서는데, 어느날 전우치의 스승이자 화담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도사인 천관대사(백윤식)는 화담과 피리를 반으로 나누어 갖고 있던 도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전우치는 천관대사를 죽인 이를 목격하지만 오히려 천관대사를 죽이고 피리를 노리는 범인으로 지목당한다. 결국 전우치는 자신의 개이자 친구인 초랭이(유해진)와 함께 그림 속에 봉인되고 만다. 그로부터 500년 뒤 현재. 요괴들이 다시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하고, 위급한 상황에 몰린 신선들은 궁여지책으로 전우치를 다시 그림에서 불러내 요괴 퇴치를 부탁한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 전우치는 지난 시절 자신이 반한 여인이자 매우 중요한 존재였던 것 같았던 여인과 똑같이 생긴 인경(임수정)을 만난다. 물 만난 고기처럼 전우치는 초랭이와 함께 도심을 휘저으며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화담이 다시 나타나면서 피리를 둘러싼 대결이 다시 시작된다. 과연 전우치는 스승을 죽인 범인을 찾고 요괴들을 잠재울 수 있을까.
많은 작품을 한 건 아니지만 최동훈 감독은 풍성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능통한 감독이다. 많은 인물들의 개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범죄 스릴러를 두 편 내리 찍어 온 그가 갑작스레 가족용 액션 영화를 내놓았다고 해서 그 능력이 어디 가진 않는다. <전우치> 역시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2시간 2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쉽사리 지루하게 하지 않는 캐릭터들의 향연이다. 할리우드 히어로물 역시 한 명의 히어로가 등장하지만 주변 인물들까지 모두 쟁쟁한 배우진들로 짜여 있어 빈약하지 않고 든든한 느낌을 주듯이, <전우치>도 능력 있는 배우들이 쫄깃한 연기로 만들어내는 재미있는 캐릭터가 영화를 알차게 채운다.
그 쟁쟁한 배우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전우치 역의 강동원은 능글맞고 말썽많은 전우치의 모습을 상당히 능동적으로 소화해낸다. 최근 줄곧 무거운 역할을 도맡아 해와서 의아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스크린 데뷔작인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동원은 코미디 감각이 생각보다 뛰어난 배우다. 표정 연기가 꽤 살아있고, 대사도 차지게 할 줄 알며, 어설프게 망가지지 않는다. 대사에서 사투리의 기운을 느낄 수는 있지만 창을 하는 듯 리드미컬한 대사를 제법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그 기나긴 팔과 다리로 펼치는 와이어 액션은 나풀나풀 한국무용을 보는 듯 하다. 오랜만에 영화에 돌아온 그는 그만큼 활기차고 적극적인 연기로 다른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주인공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해낸다. 전우치와 맞서는 화담 역의 김윤석은 비록 <타짜>에서만큼의 소름끼치는 존재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칫 유치하게 보일 수 있는 악역을 전혀 유치하게 보이지 않고 멋드러지게 만드는 마력을 다시 한번 선보인다. 그가 몇년 만에 맡은 가장 멀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는 화담은 탁월한 도술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전혀 뽐내지 않고 '정중동'의 태도로 맺고 끊음을 확실히 하는 인물인데, 김윤석의 나즈막한 말투와 시니컬하면서도 슬퍼보이는 눈빛은 화담을 단순한 악역을 뛰어넘어 어떤 신사적 매력을 지닌 인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서인경 역의 임수정은 자칫 숱한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완전히 묻힐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샤방샤방한 활기를 통해 주연들 중 홍일점으로서 뚜렷한 빛을 발한다. 보기 쉽지 않았던 사극 속 모습에선 은근히 내숭 있는 여인의 사랑스러운 면을 드러내고, 현대 부분에서는 신데렐라형 캐릭터와 팜므파탈형 캐릭터를 순식간에 오가며 여러 캐릭터들 틈에서 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간인 초랭이 역의 유해진은 말개그와 몸개그를 꾸준히 오가며 이 영화의 활기찬 전개에 더욱 윤활유를 부어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전우치 못지 않은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갖고 있는 것보다는 바라는 것이 더 많으면서, 재치있고 순박해 히어로 캐릭터인 전우치 옆에서 장단 맞추기 딱 좋은 역할을 한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그에게 닥치는 결말 부분의 충격적인 진실도 중요 포인트다. 이러한 주연급 캐릭터들 이외에도 <전우치>에는 버리기 아까운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짧지만 강하게 스승의 기운을 전하는 천관대사 역의 백윤식, 능력은 뭣도 없으면서 유명인사 티는 있는대로 다 내는 촐싹녀의 모습을 훌륭히 구현해내는 여배우 역의 염정아, 신선(또는 종교인)으로서의 무게감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지 오래인 채 깨알같이 개그들을 던지는 신선들(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조연들) 역의 송영창, 김상호, 주진모 등 웬만해선 빈틈을 주지 않는 풍성한 캐릭터들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다.
<전우치>는 화려한 대사들로도 기억될 만 하다. 원래 최동훈 감독들의 전작들이 모두 감히 범접하기 힘든 말발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었는데, 이런 요소는 <전우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극적 요소가 절반 가까이 섞여 있기 때문인지 속담, 격언 등을 활용한 대사들이 눈에 띄며 만담처럼 쉴새 없이 풀어져 나오는 대사들은 현란하면서도 사극적 모티브와 12세 관람가의 영향으로 욕설이 난무하지 않고 세련되며 깔끔하다. 때로 시조나 판소리를 읊듯 줄줄이 흘러나오는 대사들은 이 영화를 현대적으로 세련된 와중에도 한국적인 고전미를 어딘가에 품은 듯한 느낌의 영화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영화 속 대부분의 웃음을 민망한 상황이나 과장된 몸개그보다 촌철살인의 대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영리한 최동훈 감독식 영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하며 <전우치>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이야기와 기상천외한 반전을 지닌 탄탄한 장르영화로 기대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다소 정신없을 수 있지만 신명나고 흥겨운 것이 한국적인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로서 <전우치>는 그만의 독특한 즐거움을 확실히 선사한다. 사실 이 영화가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아예 상관 없는 곳에 떨어져 있는 경우는 아니다. 다소 평면적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도 역시 배신의 아이콘이 자리잡고 있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 향후 이야기에 관한 복선을 예리하게 깔아놓는 치밀함도 간혹 보이며, 복수와 같은 극적인 감정이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전형적 장르영화로서의 재미보다는, 한바탕 잔치 마당같은 시끌벅적 난장판적인 구조를 이 영화가 일부러 택했다는 데 있다.
봉인된 요괴가 풀려나면서 다시 시작된 세상의 혼란과 이를 매듭짓기 위해 나선 도사의 활약. 여기서 '요괴'를 '악의 세력'으로 바꾸고 '도사'를 '슈퍼히어로'로 바꾼다면 여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지닐 법한 이야기 구조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세련되고 볼거리 많은 장르인데 반해 요괴, 도사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 한국식 스타일이 된다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숱하게 봤던 아동물처럼 촌스럽게 변할 것만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우치>는 이러한 관객들의 우려를 정면돌파한다. 축지법, 분신술과 같은 고전적인 도술을 거침없이 뽐내며, 온갖 동물의 모습을 한 요괴가 활개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명절 만화인 <머털도사>에서 봤을 법한 신비로운 은둔지의 풍경을 재현해내기까지 한다. 대신에 영화는 이러한 전형적인 한국식 소재들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스러운 형식과 어설프게 이어붙이지 않는다. 이러한 소재를 풀어내는 방식 역시 철저히 한국적 스타일을 기반으로 함으로써 소재와 전개의 괴리감을 최소화한다. 이 한국적 전개 방식이란 보기 좋게 가다듬고 절제하기보다는 흥겹게 흐트러지는 방식이다.
인물들이 벌이는 액션은 폭력적이라기보다는 유려한 와이어 액션과 부드러운 손놀림이 어우러져 한편의 춤사위를 보는 듯 하다. 악역으로서 매우 진지한 역할을 담당하는 화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유머코드를 장착하고 있어 누구 하나 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번갈아 가며 웃음을 선사한다. 비범한 존재들이 펼치는 도술은 거대하고 비장하기보다 능청스럽고 익살 맞으며, 이들의 활약을 뒷받침하는 음악 또한 전혀 무게 잡지 않고 가벼운 신명을 내내 품고 있다. 전우치가 몸에 지니는 부적은 여느 히어로들 부럽지 않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무기 역할을 하며, <스파이더 맨>이 뉴욕 곳곳을 격전지로 삼았듯 <전우치>는 청계천, 인사동 등 서울 구석구석을 격전지로 활용한다. 괜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흥겨운 난장을 즐기던 옛날 우리나라의 문화처럼, <전우치>가 펼치는 이야기 역시 어느 영웅이 비장하게 써내려 가는 서사시가 아니라 소란스러운 한바탕 마당놀이에 가깝다. 이처럼 <전우치>의 결정적 미덕은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지닐 법한 전형성을 한국적 신명으로 꽤 설득력 있게 치환했다는 것이다.
리얼리티, 빈틈없는 이야기 구조는 <전우치>에서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익살스런 연기와 시원시원한 볼거리, 잔치 분위기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한국적인 흥겨움이다. 마치 과거에 전래 동화를 영상화한 여러 비디오물을 볼 때처럼 무언가 잘 가다듬어지지 않은 듯 하면서도 신나는 기분이 느껴진다. 다만 <전우치>는 1급 감독의 매끈한 연출과 1급 배우들의 알찬 연기, 100억이 넘어가는 제작비가 아깝지는 않아 보이는 그럴싸한 볼거리가 어우러져 조악한 어린이용 영화가 아닌 가족용 대작이 되었다. 1급 배우와 제작진들이 펼치는 흐드러지는 마당놀이를 보는 듯한 기분, <전우치>가 선사하는 흔치 않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