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첫 타자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영화로 모습을 드러내며 후에 있을 판타지 블록버스터의 전성기를 열 때, 많은 성인 관객들은 아마도 '이 유치한 판타지물이 어떻게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난 당시 이 시리즈에 한창 빠져 있던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 이후에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판타지물들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해리 포터> 시리즈가 꽤 잘 빠진 판타지물이었음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매 작품들이 던지는 독특한 설정에는 흥미를 느끼면서도 막상 내용물은 그 큰 기대감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기어코 그리스 로마 신화에까지 그들의 손길이 뻗쳤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이야기 자체의 매력으로 빠져들게 하는 소재 말이다. 그것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포문을 성공적으로 열었던 장본인에 의해서. 사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은 <나홀로 집에>, <미세스 다웃파이어>, <해리 포터> 1,2편 등을 만들어오며 할리우드 가족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될 만한 감독인지라(물론 <해리 포터> 시리즈는 감독의 능력보다는 원작의 위력이 컸겠지만), 그가 새롭게 내놓은 판타지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이하 <번개 도둑>) 역시 그저 '또 나왔냐' 싶은 그렇고 그런 물타기 영화로 마냥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번개 도둑>은 역시 일정 부분 재미를 보장하는 영화다. 물론 이야기의 힘은 기대에 비해 많이 달리지만.
물 속에서 유난히 오래 버틸 수 있는 것 정도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인 줄만 알았던 퍼시 잭슨(로건 레먼)은 어느날 선생님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괴물로 변신해서는 '번개가 어디 있느냐'며 추궁당하는 일을 겪는다. 이게 웬 생뚱맞은 날벼락인가 생각하던 퍼시에게 그의 친구이던 그루버(브랜던 T. 잭슨)와 스승이던 브루너 선생(피어스 브로스넌)은 갑자기 본 모습을 드러내며 퍼시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는 하반신이 당나귀인 사티로스였던 그루버와 원래는 하반신이 말인 켄타우로스 케이런이었던 브루너는 퍼시가 실은 물의 신 포세이돈(케빈 맥키드)의 아들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는다. 퍼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반신반인인 '데미갓'이고, 현재 그는 제우스의 번개를 훔친 도둑으로 의심받고 있어서 그가 만약 번개를 전해주지 못하면 제우스(숀 빈)와 포세이돈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이란다. 한 순간에 신변에 큰 위협을 받게 된 퍼시는 데미갓들만 모여 훈련을 받고 생활하는 '데미갓 캠프'에 들어온다. 그 과정에서 엄마(캐서린 키너)를 잃은 퍼시는 저승의 신 하데스(스티브 쿠건)로부터 번개를 돌려준다면 데리고 있는 엄마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주변에선 정석적인 길을 밟자고 극구 만류하지만 엄마를 구하는 게 우선인 퍼시는 몰래 캠프를 빠져나와 누명을 벗고 엄마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이 모험엔 친구 그루버와 새롭게 만난,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딸 아나베스(알렉산드라 다다리오)가 함께 한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메두사(우마 서먼), 히드라 등 신화에서나 보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평범한 10대가 주인공인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는 그 주변인물들이 워낙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주인공은 신선한 새얼굴이 맡고 주변인물들은 반대로 꽤 알려진 중견 배우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 <번개 도둑> 또한 그러한데, 모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퍼시 잭슨 역의 로건 레먼을 비롯해 함께 하는 친구들까지 우리에겐 생소한 젊은 배우들인데 반해, 그들 주변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화 속 신비로운 존재들은 나름대로 쟁쟁한 배우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 숀 빈, 우마 서먼, 로자리오 도슨 등의 배우들은 대부분이 특별출연이라 해도 될 정도로 비중이 생각보다 상당히 작은 편이지만, 각자가 나름대로 뚜렷한 캐릭터로 젊은 피 중심의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깊이는 별로 없지만, 개성은 확실하다. 특히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메두사 역의 우마 서먼이 펼치는 징글맞은 팜므파탈 연기는 비중은 적지만 꽤 인상적이다. 더불어 퍼시 잭슨 역의 로건 레먼은 새 얼굴이지만 훤칠한 외모와 적극적인 연기로 극 전체를 무리없이 이끌어나간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기대할 것은 뭐니뭐니해도 머릿속으로 그려만 왔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거대한 세계가 현실과 맞물려 어떤 기막힌 볼거리를 보여줄 것인가 하는 부분일 테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야기가 처음 출발한 지 셀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거대한 규모, 캐릭터, 모험, 성적 매력, 러브 스토리, 윤리적 문제까지 품고 있는 이 이야기는 그 어느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도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로 만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거대하고 막연한 세계였기에 영화를 통해 만나기도 여태까지 매우 어려웠는데, 올해 다행히도 이 영화를 포함해 두 편이나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상황에서(다른 하나는 4월에 개봉하는 할리우드산 영화 <타이탄>이다.) <번개 도둑>은 좋은 호기심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물론, <번개 도둑>은 그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먹힐 만한 모험과 세계관, 캐릭터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면서 이제는 판타지 영화의 중요한 클리셰가 된,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의 미묘한 공존'은 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해리 포터> 속 판타지 세계관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원작의 독자가 아니라면 선뜻 흥미가 생기기 쉽지 않은 데 반해, <번개 도둑>은 이미 익히 알려진 광범위한 신화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캐릭터나 이야기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워낙에 천문학적 수준의 인기를 얻었었으나 <번개 도둑>은 그렇지 못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번개 도둑>이 그래도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판타지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또한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영화 속에 나타나는 신화 속 세계의 형상화는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다만 영화는 예상대로 그 대담한 신화 속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에는 소심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우리가 상상한 신화의 이미지를 제대로 영상에 옮긴다면 결코 가족영화가 될 수 없겠지만, 영화는 카피에서도 언급하는 '신들의 전쟁'의 전초전마저도 보여주지 않을 만큼 소박(?)한 편이다. 아마 여러 에피소드를 지닌 판타지 시리즈의 서막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천지를 뒤집을 만한 거대한 스케일의 특수효과를 기대한다면 좀 실망할 수 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퍼시가 한차례 물난리를 일으키는 장면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규모와는 사뭇 다르고, 퍼시가 생활하는 새로운 터전인 데미갓 캠프는 호그와트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물론 이 와중에도 머리 다섯 개를 가진 뱀 괴물 히드라와의 결투, 도시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후반부 공중 결투신, 예상을 살짝 벗어나는 전경을 자랑하는 지옥의 모습 등 꽤 볼만한 장면들이 중간중간 등장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울 만한 요소는 막연한 소설 속 설정의 꽤 그럴 듯한 현실화이다. 신화 속에서만 들어왔던 '신과 인간의 공존'이 현대에선 어떻게 적용될지를 스펙터클하게는 아니더라도 아기자기하게 표현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존재하는 올림포스 산, 본인의 취향에 맞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메두사, 록스타 복장을 선호하는 저승의 신 하데스와 반항적인 아내 페르세포네, 막강한 신의 이미지에서 누군가의 어머니 또는 아버지로 한층 가까워지는 거대 신들의 모습이 어딘가 코믹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날개 달린 에르메스의 신발이 컨버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든가, 직접 볼 수 없는 메두사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거울이 아닌 아이팟에 반사시켜 보는 것 등은 미국이 만들어낸 현대 문명과 신화적 이미지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데미갓 캠프 속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은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지만, 부모 중 한 쪽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이들로서 말하자면 그들 역시 일종의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이다. 강한 능력을 뽐내지만 실은 마음 한 구석에 결손 부모에 대한 그리움 또는 원망을 끊임없이 품고 있는 아이들로서, 점점 빈자리가 많아지고 아이들은 외로워지는 현대 가족의 단면을 재치있게 뒤튼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확대해석일 수 있겠지만.
<해리 포터>의 포문을 성공적으로 연 감독이 내놓은 새로운 판타지물이지만 <번개 도둑>은 사실 그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진 못한다. 원작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이야기의 전개는 침착하고 매끄럽기보다 급작스러우면서 건너뛰길 잘하는 것 같고, 수많은 캐릭터들도 확실히 드러내기보다 맛보기 정도로만 훑고 지나가는 듯 하다.(특히 성인배우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교수들보다도 비중이 적은 것 같다.) 하지만 '새로운 판타지 시리즈의 서막을 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볼 만큼 진중한 완성도를 보여주진 못해도, 가족이나 젊은 친구들끼리 적당한 배경지식과 재치를 지닌 즐길거리를 찾는다면 이 영화는 꽤 적절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 신화의 걷잡을 수 없는 스케일을 현대로 그대로 옮겨오진 못했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생활 반경 속에 신화적 요소들을 유연하게 심어넣은 솜씨는 <번개 도둑>을 빼어나진 않지만 썩 괜찮은 판타지물로 만들어 놓았다.
+ 엔딩 크레딧이 잠시 올라가다가 보너스 장면이 등장한다. 꽤 유머감각 있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