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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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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0 오전 2:4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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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동화다. 그러나 동화 같은 구성과 내용을 한 꺼풀 벗기면 동화 속에 감춰진 현실세계가 드러난다. 이 영화, 10대를 위한 영화다. 미국의 10대들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갈망을 담은 내용을 통해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세상으로 나가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10대들의 인간적 고뇌가 이 영화에 물씬 풍긴다. 미국의 10대의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 한국의 10대도 느껴지는 그런 상징들로 가득하다. 경제적 고충이 심화되면서 깨지기 시작한 가족의 유대는 편모슬하의 10대를 양산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인간적 고민은 더욱 심화된다. 특히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내적인 Trauma는 그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고민덩어리다. 그래서일까? 이 동화 같은 영화 속엔 10대의 위기 의식과 비현실적인 욕망이 표출된다. 주요 관객의 요구에 대한 당연한 감정노동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저려 왔다. 그들의 고민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해결은 결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한계를 넘는 것들이었고, 단지 극장이란 암실에서나마 위로를 받을 뿐이었다. 10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은 주인공 Percy Jackson(Logan Lerman)이다. 10대의 어느 고교에 다닐 성 싶은 이 소년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홀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Percy는 누군가의 자랑스런 아들로 자리매김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은 물론, 그의 앞에 있는 현실은 잔인할 뿐이다. 이런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영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그에게 제시해줌으로써 그의 멋지고 새로운 인생을 실현시켜준다. 그것도 신화의 세계로만 구성된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과의 연결을 통해서 말이다. 비록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영화가 만들어 준 진실을 알기 전까지 그는 어느 Loser 집안의 자식일 뿐이며, 그의 아버지는 의붓아버지로서, 그의 행실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남일 뿐이다. 그런 불행 속에 있는 Percy에게 그리스 신화로 채색된, 영화가 제공한 환상의 세계를 통해 그는 영웅으로 탈바꿈한다.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 앞에 아버지가 걸림돌로 남아 있다. 아버지, 언제부터인가 가족 구성원들 중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된 가족 구성원이다. 세계 문학은 물론 한국문학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로서, 아버지는 가족의 화목을 깨거나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상징으로 언제나 묘사된다. 가부장적이란 표현은 집안의 사회?경제적 책임을 지는 굳건한 토대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즉 부정적인 대상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서경성’의 표현처럼 ‘긍정적 부성’의 부재라고까지 표현된 근대 이후의 아버지의 위상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다. ‘기러기 아빠’도 존재하지만 그런 희생적인 내용보다 신경숙은 물론 많은 여성작가들조차도 공포스럽고 권위적이고 무능하기까지 한 존재로만 묘사된다. 이런 현상이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화 역시 이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우아한 세계’나 ‘즐거운 인생’과 같은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한 영화도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똥파리’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갈등의 원천으로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버지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가족 구성원일 뿐이다. 이런 아버지가 이 영화에도 역시 존재한다. 그것도 비겁한 모습으로 말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 강력한 파수꾼이다. 아버지란 존재가 붕괴하면 가족 전체의 안녕이 무너진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도 간헐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Percy의 가정적인 위기와 아버지의 부재를 연결시키면서 아버지에 대한 Percy의 분노와 미움은 이 영화의 보이지 않은 핵심 축이자, 미국 청소년들이 현재의 불운한 상황을 막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 고충에 대한 버팀목이 없는 10대에게 좋은 아버지는 갈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자 갈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Percy는 현대판 남자 신데렐라이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안 순간 그는 강한 자이자, 책임 있는 행동을 아는 청소년으로 성장한다. 기이하게도 그 시점이 바로 자신도 아버지가 있으며, 그 아버지는 대단한 신이란 사실을 아는 순간이었고, 그에 대한 대우도 크게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번개도둑이란 오명을 썼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탄생 신화에 의해 백조로 거듭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 없는 불운한 청소년의 인생이 순식간에 재벌 아들로 변하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 점에서 물론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불우한 자신을 저주하며 새롭게 권력 있고 돈 많은 멋진 왕자와 공주를 꿈꾸는 수많은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멋진 Fantasy를 제공하는 시점이다. 결국 아버지의 위상은 자식의 인생을 화려하게 해줄 수 있는지 아니면 Loser의 인생을 대물림 시킬 수밖에 없을 만큼 무능한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비현실적인 Fantasy다. 그리고 동화다. 물을 통해 조화를 부리는 모습은 한국의 홍길동이나 전우치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류의 Fantasy는 세계 어디에서나 있으며, 전설이든 설화든, 아니면 민담이든 하루 노고에 지친 어느 불쌍한 인생들에게 잠시나마 활력을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영화 역시 그와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영화 뒤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청소년의 갈망은 사실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사회적 Loser들이 양산되는 이 시점에서 위기에 몰린 청소년들이 자신의 희망을 그래도 꿈꿀 수 있게 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로 인해 버팀목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들어진 아버지란 사실이다. 좋은 아빠, 착한 아빠에 능력 있는 아빠까지 겸해야 하는 오늘의 아버지들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폄하해도 결국 그 존재가치는 아직도 높은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노고를 받아들이기보다 너무 수단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으로서의 포세이돈이 ‘데미갓’인 아들 Percy에게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용서를 비는 장면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아들에겐 아버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의 번뇌에 대한 아쉬움이 우선이었던 Percy의 모습은 아버지란 존재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했다. 그리움의 대상이기보다 자신의 버팀목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내게 해주는 아버지가 더 필요한 아들의 모습을 담은 이 구도는 경쟁만 가열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인 21세기의 당연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가족이란 공동체 속에서도 아버지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냉엄한 현실도 알게 됐다. 즉, 그 구성원들이 서로 어떤 존재감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Happy Ending이었지만 그 과정은 그렇게 힘든 모습이었다. 오늘의 아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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