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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떻게 운명을 지배하는가 예언자
jimmani 2010-03-01 오후 11:15:31 1263   [0]

 

훌륭한 영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특정한 형식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영화가 있고, 우리가 원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을 보여주지만 그 결과물이 너무 멋진 영화가 있다. <예언자>는 후자에 속한다. 사실 영화는 불량청소년이 교도소에서 생활하며 겪는 무서운 범죄의 늪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예언자'라는 제목은 마치 판타지 영화를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범죄 스릴러와 다르다.

 

비교적 평범한 불량청소년이었던 주인공이 냉혹한 범죄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가는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 느와르와 비슷해 보이지만 영화는 그 클리셰를 따라가지 않는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놓인 이의 불안한 심리, 어둠에 휩쓸리는 듯 하다가 어느덧 그 위에 올라서고 마는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이 영화는, 살벌한 리얼리티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이고, 핏빛 어둠 속에서 실낱 같은 빛을 비춘다.

 

 

이제 막 법적으로 성인이 된 19살 청년 말리크 엘 제베나(타하 라힘)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교도소에서 6년간 복역하게 된다. 잠깐이라도 한눈 팔았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분위기 속에서 꽁해 있는 말리크에게 나이 지긋한 복역수 세자르 루치아니(닐스 아르스트럽)가 접근한다. 간수들까지 쥐락펴락할 만큼 교도소를 주름잡는 실세나 다름없는 루치아니는 코르시카계 갱 두목으로서 영역을 야금야금 넓히려는 아랍계 갱이 교도소로 들어오자 그를 처리하기 위해 역시 아랍계인 말리크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 일만 처리해 주면 앞으로 남은 감옥 생활동안 확실히 뒤를 봐주겠다는 루치아니의 반협박에 말리크는 얼떨결에 일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말리크는 생애 첫 살인을 저지르고, 이내 루치아니의 신임을 얻으며 교도소 안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게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생활을 이어가고픈 말리크에게 루치아니는 편한 감옥 생활을 미끼로 계속 명령을 수행하라는 협박을 받고, 동시에 교도소에 함께 있는 다른 동료들의 마약 거래 동업 제안도 들어온다. 위상은 높아가지만 점점 위험해지는 감옥 생활, 말리크는 과연 복역을 끝낸 후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까.

 

2시간 30분이 넘어가는 대서사시급 러닝타임을 자랑하지만 <예언자>의 활동범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갱스터물에서 흔히 접하는 스펙터클한 총격신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이,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도소 안에서 보낸다. 어떻게 보면 여느 학교 못지 않게 거대한 사회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밀폐되어 있는 듯 답답한 곳. 이 곳에서 영화는 제대로 정신 챙길 겨를도 없이 들어온 19세 소년 말리크의 교도소 생활을 밀착취재한다. 말리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 때문에 교도소에 들어왔는지와 같은 배경 설명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리크에 대해 알게 되는 배경 정보는 연고를 알 수 없으며 비행을 해 오긴 했지만 폭력을 일삼을 만큼 거친 성격은 아닌 19세 소년이라는 것 정도다. 이 상태에서, 영화는 웬만해서 말리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교도소의 생리 속에서 연약하던 말리크가 어떻게 살아나갈 방도를 찾고 강해지는가를 그리는 기록물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영화적으로 다듬어진 이미지보다 끔찍하든 추하든 교도소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웬만한 여과 없이 담아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빛난다. 주인공 말리크 역을 맡은 배우 타하 라힘은 이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은 만큼 어느 이미지에도 고정되지 않은 채 신선하게 살아있는 연기를 펼친다. 말이 이제 성인이지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던 상태에서 점점 범죄 사회의 냉혹함을 배워가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남은 삶을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하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요동치는 심리가 섬세한 표정연기를 통해 멋지게 되살아난다. 겉으로 신들린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영화 속 리얼리티에 완벽하게 몸을 담글 줄 아는 자연스러운 그의 연기는 최근에 프랑스의 오스카상이라 할 만한 세자르 영화제로부터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기에 이르렀다. 그와 시종일관 대립각을 형성하는 교도소의 실세 루치아니 역의 닐스 아르스트럽의 연기도 파워풀하다. 프랑스의 안소니 홉킨스를 보는 듯, 신사적인 이미지와 야수성을 동시에 품은 채 부글부글거리는 그의 연기는 그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확실한 긴장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그의 연기에 역시 이번 세자르 영화제는 남우조연상을 안겼다.

 

종종 말리크가 임무 수행(?)을 위해 외출을 나가긴 하지만 주요 배경이 교도소 내부로 한정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예언자>는 우선 범죄 스릴러로서만 봐도 출중한 면모를 과시하는 영화다. 이런 느와르 분위기의 범죄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 갱스터 거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형식을 무리없이 빌려온다. 영화 속에서 가장 강한 임팩트를 준다고 할 수 있는 첫 살인에서 시작해 한없이 소극적이던 말리크가 시간이 지나면서 교도소 내부의 주요 인물이 되고 어떤 일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척척 해내가는 모습은 장르 영화가 지니는 스릴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각종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두 시간 반짜리 프랑스 영화'라는 간판이 부담스럽다면, 소심한 청년이 대범한 안티히어로로 거듭나는 과정에 집중하기만 해도 꽤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는 이렇게 장르영화로서만 출중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겉으로 보이는 이런 형식 속에서 꽤 많은 생각거리를 풀어놓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가 범죄 행각을 그린다고 해서 사회성 짙은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살벌한 범죄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즉, 범죄를 바라보는 사회의 도덕적인 시선 앞에 인물의 삶을 예정된 길로 흘려 보내지 않는다는 의미다. 옳지 않은 일에 맛을 들인 주인공이 결국은 참혹한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그런 식의 결말 말이다. 예상외로, 영화는 이런 식의 전개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말리크의 시선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면서 영화는 말리크를 변화시키는 세상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변해가는 말리크의 모습에 집중한다. 말리크가 맞닥뜨리는 범죄의 단면들은 종종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순간도 존재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범죄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주장하기보다 이 일련의 범죄들을 겪으면서 말리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말리크는 여느 느와르 속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무참히 휩쓸리다 끝을 맺기보다, 유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인해지며 생존을 위한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편을 택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처음엔 살인같은 건 몰랐던 말리크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말리크가 루치아니의 지시에 의해 레예브를 상대로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심리적인 난관에 봉착할 때면 항상 레예브의 환영이 말리크를 찾아온다. 극사실주의 느와르를 표방하던 영화가 이 부분에선 잠시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목에 그어진 면도날 상처 사이로 담배연기가 나온다거나 하는 장면), 말리크가 이러한 레예브의 환영에 대처하는 모습이 변해가는 과정은 이 영화의 심리 드라마적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처음엔 귀신을 본 듯 질겁을 하다가 나중엔 그냥 혼자만의 친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굴고, 결국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부르며 찾기까지 하는 말리크의 모습은 돌이킬 수 없을 듯한 범죄의 늪에 빠져든 말리크가 그 트라우마를 대처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애써 피하다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전투적으로 맞서게 되듯이 말이다.

 

그렇게 말리크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수동적으로 놔두지 않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루치아니의 도움으로 말리크의 교도소 생활이 수월해지게 됐지만 여기에 기대어 무작정 루치아니에게 의존하기보다 끊임없이 그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말리크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그는 루치아니의 수하에 있는 게 분명한데, 그는 곧죽어도 '어쩌다가 시켜서 하는 거지 내 일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루치아니의 눈치를 보며 다른 동료들이 부탁한 일에도 관여하는 등, 말리크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 않는 능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큼직한 자막으로까지 설명되는, 말리크가 곳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물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들은 왠지 그러한 방향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말리크의 적극적인 면모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리얼리티로 가득찬 영화 속에서 일말의 환상적 이미지를 던지는 '예언자'라는 요소는 결국 혼자 힘으로 성장해 가는 주인공의 의지가 집약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흔히 예언자라 함은 예정된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사람을 일컫지만, 영화 속에서 말리크에게 붙여지는 '예언자'의 의미는 이와 사뭇 다를 듯 싶다. 말리크는 미리 쓰여져 있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그것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는 사람이다.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진 뒤에 갖은 혼란과 죄책감 속에서 때론 방탕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원래 원했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인간 이하의 존재들로 가득찬 곳에서 오히려 그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한다. 남들은 무덤처럼 여기던 교도소가 오히려 그에게는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동기부여의 역할을 한 셈이다. 이처럼 영화는 매우 어두운 듯한 분위기 속에서도 여느 장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전형적인 공식에 희생되는 인물이 아닌, 수 차례 부침을 겪다 결국은 운명을 지배하게 되는 인간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영화 내내 꾸준히 등장하는, 창밖을 바라보는 말리크의 이미지는 생각해 보니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 하다. 어둠 혹은 끔찍한 범죄 외에는 웬만해서 벗 삼을 것이 없는 현실에서 말리크는 끊임없이 바깥을 내다본다. 남들은 줄을 이어 바깥으로 빼꼼히 내놓고는 소심한 소통을 시도하지만 말리크는 결국 직접 바깥 세상에 발을 들인다. 말리크더러 그 어떤 범죄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은 의지의 사나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는 온갖 범죄의 유혹에 꼬임을 당했고 험한 꼴도 수없이 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해 간다. <예언자>가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 뭐같은 현실에서도 틈새로 새어나오는 빛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인간의 가치 말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예언자>는 예상과는 꽤 달리 냉혹한 범죄극이라기보다 좀 격한 휴먼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

 


(총 1명 참여)
wjswoghd
잘 보네요   
2010-03-08 20:17
mokok
줄거리...   
2010-03-07 16:19
oyh50oyh
ㅋ   
2010-03-04 10:58
snc1228y
감사   
2010-03-02 15:44
sdwsds
보고 싶은 영화   
2010-03-02 09:5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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