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에 앞서 당신은 폴 그린그래스 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계평화의 이름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 그 중심에서 이라크 전쟁의 원흉인 대량살상무기(WMD)를 찾기위해 움직이는 WMD 전담팀의 로이밀러 준위. 하지만 계속된 수색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할 수 없자 로이밀러 준위는 대량살상무기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진실을 파헤치던 밀러 준위는 결국 세계 평화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이해 관계들의 가장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기억한다. 플라이트 93 마지막의 블랙스크린이 주던 충격을. 어느샌가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 갇혀있던 나를 현실세계로 강하게 퉁겨내던 그 까만 화면을. 가슴이 답답해 터질것만 같던 그 순간을. 그리고 폴 그린그래스 라는 이름을. 그랬다. 나는 폴 그린그래스라는 감독에게 반했다. 신들린 듯한 핸드헬드가 가져오는 그 현장감에 반했다. 감히 딴생각 할 틈을 주지 않는 스피디한 편집까지도. 이번에도, 폴 그린그래스 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화를 가지고 돌아 왔다. 그린존은 주이라크 미군 사령부와 이라크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이라크 국제 지역(International Zone of Iraq)의 별칭으로 미군의 성역이라 불리는 바로 그곳 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화면을 투박한 핸드헬드로 거침없이 찍어낸다. 입자가 산산히 부서지는 화면은 영화와 유투브 이라크전 실황의 문턱에 서있다. 광량 부족으로 인한 극심한 노이즈로 리얼리티를 표현 할 줄이야.
영화는 가차없이 미국의 불편한 진실들을 끄집어 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진실들을 관객의 얼굴에 들이대고는 이렇게 외친다. 이게 세계 평화의 실체라고. 전쟁조차 순수하지 못한채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자본주의의 폐혜에 대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가진 추악함에 대해, 알아야만 할 진실에 대해 소리친다. 스크린을 통해 내뱉는다. 물론 이러한 외침들이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어느정도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을 진부한 진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건 그린그래스라는 걸출한 연출가의 힘이 한몫 했으리라. 모두가 알고 있고 영화로 까지 얘기한다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운하지 못하다. 우리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이라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진부한 진실로 오락성을 이끌어내고, 개운하지 못한 뒷맛까지 남기고 나서야 말한다. 이라크의 일에 미국이 간섭하지 말라고.
우리나라의 불우한 역사가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나뿐인가. 이라크의 일에 미국이 간섭하지 말라는 저 대사가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는다. 전쟁으로 피폐해 졌으니 보살펴 준다던 그때의 쓰라린 역사가. 그리고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우리의 지도자는 정녕 누구의 손에 죽었단 말인가. 이라크의 현실에서 우리의 아픈 과거가 사무치도록 와닿는다.
그래, 내가 얼마전까지 군대에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영화속의 군인들의 모습에 어떤 묘한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역시나 군대라는 조직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골칫덩이일 뿐이라는 사실도. 그저 묵묵히 시키는 것만 할뿐인 껍데기들이.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명령에 따라 행동 할 뿐인, 녹슨 모터로 움직이는 그런 존재들 만이 군대에서 환영받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밀러준위는 체제에 순응치 못하는 반동 분자다. 미국을 수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미국의 치부가 드러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국 마지막까지 나아간다. 결국 그는 군대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얼굴로 나오면서도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니. 물론, 군데 군데 제이슨 본의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맷 데이먼은 이라크의 실상을 파헤치는 밀러준위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그것도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린그래스와 함께 말이다. 둘러쌓이고 얻어맏고 코피쏟고 하는 장면들이 어색해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맷 데이먼의 연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속에 제이슨 본이 완벽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겠지.
본시리즈가 성공한 이유로 그 아류작들이 무수히 탄생하고 있다. 물론 연출적인 면에서 말이다. 얼마전 종영한 우리나라의 모 첩보 액션 드라마도 감히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부끄러운 핸드헬드와 거친 줌을 따라 했었다. 물론, 그런 기법이 없는건 아니지만 내눈엔 본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못돼먹은 카메라 웤때문에 그 드라마를 보는 것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오늘, 그린그래스가 그 수많은 아류작들에게 보란듯이 핸드헬드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이토록 투박한 핸드 헬드가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 감독이 핸드헬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한 노력들을 아끼지 않는 다는 얘기다. 그저 손으로 들고 무작정 줌을 당긴다고 이런 느낌이 나오는게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미군 성역의 이름으로, 미군 최악의 치부를 이토록 거칠게 드러내다니. 영화의 마지막 대사인 '표현이 너무 거칠군'을 그린그래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물론 이 영화의 내용이 생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가공되고 조리된 진실일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지 않은가. 나에겐 어쩌면 영원히 진실을 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차피 영원히 알수 없을 진실 이라면, 그린그래스가 그린 그림을 함께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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