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느려서 몰랐다. 이렇게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줄은. 끝까지 이성적으로. 담담하게.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나이는 열아홉,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는, 아직 소년의 냄새가 조금 남아있는 아랍계 청년하나가 경찰관을 폭행한 죄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국선 변호사는 잇속 챙기기 바쁘고 청년에겐 지폐 한장이 전부. 그마저도 교도소 반입이 금지 당한다. 징역 6년. 19년 철없이 살아온 소년에게 6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길고도 아득하다. 감옥은 소년이 부리는 허세를 받아 줄 만큼 만만치도 않다. 살아 남기위해 동포를 죽이고, 아랍인들을 개, 돼지라 생각하는 코르시카 마피아의 밑에 들어간다. 그렇게, 소년은 세상을 배워나간다.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말이다.
이 영화는 갱스터 무비가 아니다. 느와르도 아니다. 뒷세계 조직의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런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주인공 '말리끄 엘 제베나'만을 바라본다. 그를 바라보거나,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철저하게 말리끄만을 주시한다. 두 시간 반을 넘는 러닝타임 내내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애송이가 코르시카계 마피아의 대부 루치아니의 신임을 얻고, 비밀작전을 수행하면서 배신까지 저지른 다음,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무척이나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게 담아낸다. 천천히, 매우 느리지만 이영화는 분명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끝모를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랍계이지만 무슬림이 아니고 코르시카계 마피아와 함께하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오히려 그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감옥은 세상의 축소판이고 그 곳에서 말리끄는 깨달은 존재가 된다.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 존재. 독학으로 코르시카어를 습득해 루치아니의 밀정 노릇을 하게 되고 동포인 아랍계 사람들과도 거래를 하며 감옥이라는 독특한 생리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만들고 굳건히 해 나간다. 말리끄에겐 기회가 없었다. 그저 운명이 있었을 뿐이다. 조용히 기술을 배워 나가려 했지만 운명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운명을 개척하는 방법을 택했다.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말이다. 청년은 점점 남자가 되어 간다. 19년동안 배워온 모든 것보다 6년동안의 감옥생활이 그에게 더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줬다. 뒷세계의 모든 더러운 행위들을 깨우쳐 가며 처음의 어리숙했던 모슴은 사라지고 냉혹한 현실을 더 냉혹하게 돌파하는 말리끄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타하 라힘. 점점 성장해 나가면서 서서히 스크린에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연기는 두시간 반이라는 극을 이끌어 나가기에 한점 손색이 없다.
영화의 제목인 예언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같은 예언자를 말하는게 아니라 예수나 모세, 마호메트와 같은 종교적 선지자, 신의 가르침을 받은자를 일컫는다.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 가장 밑바닥의 어두운 세계를, 살인과 매수, 폭력과 배신으로 물든 이 이야기를 종교적 관점으로 풀어 나간다. 철저하게 차갑고 담담하며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말이다. 그것도 매우 느리게. 하지만 이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야기가 가져오는 중압감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고아로 태어나 스스로 깨우침을 얻고, 자신이 죽인 동포의 환영이 계시를 주고, 미망인을 책임지고, 스스로 가야할길로 나아가는. 어딘가에서 들어봄직한 종교적 선지자들의 삶이 단편적으로 이어지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아간다. 총탄이 빗발치고 소리가 점멸하는 그 순간, 그의 환한 미소.
40일간의 유배. 자신을 가리던 그늘, 유혹, 번뇌 그리고 족쇄. 자신을 구분하고 규정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진 그가 있다. 40일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깨우친다. 철모르던 애송이가 진정한 예언자의 이름으로 돌아 온 것이다.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다 보니 영화의 주 무대는 감옥이다. 시퀀스의 대부분이 이 좁아터진 감옥안에서 이루어 지는데 안그래도 좁은 감옥이 좁아터진 카메라로 인해 더더욱 좁게 느껴진다. 이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그 좁아터진 화면에, 그것 마저도 온전히 보여주는 장면은 몇 없다. 관객에게 극도의 답답함을 강요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리끄가 첫 외출을 나가는 순간, 나도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 아쉽다. 시네마 스코프를 채용해서 더 넓은 화면을 더 많이 가렸다면, 그 답답함은 배가 되었을 텐데. 그리고 드 답답함이 해소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또한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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