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본 대부분의 영화들은 모두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어떤 영화는 문제제기만 하고, 어떤 영화는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용서는없다 는 이기심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고, 그 이기심에 대한 불용서를 결론 내린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기심에 대하여 양심에 자유로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영화를 만든 감독조차.. 술집여자로 나온 배우가 자신의 딸이었다면, 그녀를 벗기고 남의 정액을 받아먹는 씬을
찍을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씬은 배우가 동의한 것이지만 그 배우도 피할수만 있었다면 그 씬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여배우로 하여금 벗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시스템에 그녀 자신을 내어주고야 만다. 그녀가 수치심까지 버린 돈과 인기의 노예로 전락되었지만, 실은 그녀도 누군가의 사랑하는 딸이고, 언젠가 누군가의 아내가 될 것이며, 자녀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다. 우리의 소중한 누군가와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사람' 그 자체다. 여성의 벗은 몸을 탐하는 남성의 이기심이 결국 여배우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감독은 이것을 적절히 이용한다. 우리는 그 영화를 돈을 주고 본다.
영화가 고발한 용서할 수 없는 자에 대한 자아상은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가해자에 입장에서 무감각하기 쉽다. 가령, 아버지의 입장에서 당해보지 않으면 피해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경험을 설경구는 철저히 경험한다. 자신의 이기심의 칼이 딸의 몸을 휘저었다는 사실에 충격의 충격을 받고, 그러한 자신을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아직 상대방의 입장에 처해보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그 이기심을 새만금 사업에까지 확장시키지만 거대 이슈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기심이란 주제는 우리 자신의 작은 삶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자가 되기도 하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자가 되기도 하며 죽고 죽인다. 순환되는 복수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은 용서와 이기심의 극복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것이며, 어떻게 이기심을 극복 할 것인가. 기독교적 진리로 말하자면, 용서는 구속 곧 죄사합이고, 이기심의 극복은 구원이다. 기독교가 단순히 용서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용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했고, 용서받는 자는 그의 죄된 옛 자신의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만이 용서가 보증된다. 구원 역시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선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구원이다. 비록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용서와 구원의 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 '용서란 존재할까'라고 묻는다면, 이 비관할 수밖에 없는 질문에 대한 답에 '그렇다'라고 답하고 싶다.
영화속에 숨어있는 상징성을 찾아서
http://www.cyworld.com/Moviesymbolism/3783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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