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여자에게 아무 확신도 없이 먼저 데이트신청을 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무모한짓을 안해도 운명적인 사랑이 언젠간 자신을 휘감을 거라고 생각하는거죠. 이런 그의 앞에 어느 날 운명의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500일의 Bitch는 시작됩니다.
겉보기에 로맨스물처럼 보이는 이 기괴한 영화는 매우 날카롭습니다. 적어도 남자들한테는 말이죠. 주인공 톰의 캐릭터는 기존의 로맨틱코미디물이 내세우던 남자주인공들과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그는 낭만적이고 순수하며 언제나 그의 곁엔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죠.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 설정외엔 그냥 다른 장르라고 생각하고 보시는게 더 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예리한 칼날이 과거 연애에 실패한적이 있는 남자들과 앞으로 그럴것같은 모든 남자들을 겨냥한다는 느낌이 드는건 이별의 순간을 거북할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부분 때문이기도합니다. 썸머는 시드와 낸시의 비유를 통해서, 톰은 노트에 식칼을 든 썸머와 난도질당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으며 철저하게 서로를 피해자로 몰고갑니다.
설상가상으로 톰은 운명의 피해자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비관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다니는 카드회사에서 솔로에겐 명언이요, 커플에겐 추태일뿐인 말들을 내뱉고 그만두기까지 합니다. 그에 반해 어린시절 부모의 이혼을 보고 자란 썸머는 운명이니 사랑이니 그런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에 예전부터 그래왔던것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는 친구정도로만 생각할뿐입니다.
어떤 관계의 정립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그걸 소신과 원칙이라는 말로 견고하게 포장하지만 내용물은 두려움이죠. 누군가는 이 포장지를 열어서 사실 이건 당신이 성숙하다는 징표와도 같은것이라고 말해줘야 보다 발전된 관계를 맺을 수가 있게됩니다. 포인트는 포장지를 일단 열어야 한다는건데 톰은 열 생각조차 없었죠. 왜냐면 평생에 단 한번 찾아오는 운명의 상대가 자신에게 모든걸 보여주지않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링고스타는 이 영화의 미스테리를 관통하는 실마리인 동시에 썸머가 가지고 있는 포장지를 풀 유일한 방법입니다.무의식적으로 남자들이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죠. 너무나 사랑하기때문에 나의 가치관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것 말입니다. 링고스타를 최고의 가수로 생각하는 썸머에게 그건 납득할수 없는 일이라고 난도질하는 톰의 모습은 어찌보면 아무 문제 없는 싱거운 의견차이로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링고스타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앞으로 살면서 그들이 겪을 수많은 가치관의 충돌. 그것의 결말을 어린시절 이혼한 부모로부터 학습한 썸머이기에 더더욱 톰과의 관계는 발전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톰은 썸머를 운명이니 사랑이니하는 순수한 생각에 그녀의 모든걸 자신에게 끌고오려고만 했지 자신을 그녀에게 내주진 않았던겁니다. 예를들어 바에서 주먹다짐을 한 부분은 그녀를 위해 톰이 드디어 한 발자국 나아간거라고 잘못생각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주먹이 나간건 취객이 썸머가 아닌 자신을 조롱했을때였습니다.
톰과 썸머의 즐거웠던 나날들을 떠올려봐도 항상 다가오는 쪽은 썸머였습니다. 첫키스를 할 때도 그렇고 다퉜을때도 먼저 찾아간쪽은 썸머입니다. 매번 수동적이고 운명에 떠밀리듯이 이끌려가는 톰의 모습은 여유를 넘어서 누르지않으면 무용지물인 자판기같은 무료함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말 그대로 톰은 그녀를 사랑하는것보다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더 사랑했던겁니다. 헤어진 후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을때 톰은 헤어짐의 본질과도 같은 링고스타 얘기를 다시한번 꺼내며 관계의 종말에 쐐기를 박습니다.
서로 권태기였을때 음반가게에서 나눴던 대화는 썸머를 비롯한 연애에 지친 여자들의 반응을 현실적으로 잘 그렸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을 그녀도 좋아하고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톰. 그의 앞에서 썸머는 정작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대로 표현하고 존중받는게 줄어만 갑니다.
특히 영화를 보고 울고있는 자신에게 왜우냐고 바보같은 질문만 해대는 톰에게 영화가 슬퍼서 그랬다는 당연한 답을 해주는 것보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자신이 바보같아서 그런거라고 자포자기를 하는쪽이 자신의 가치관을 더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걸 이별의 말미에 썸머는 깨달은듯 했습니다. 링고스타처럼 꺼냈다가 난도질만 당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 더욱 두꺼워지는 그녀의 포장지입니다.
후반부 이미 각자의 길을 충실히 가고 있을때 우연히 만난 썸머의 대답이 이 모든걸 간단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책을 읽고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책에 대해 물어봤어..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야.." "이 사람과 영화를 보러갔으면 어땠을까, 이 사람과 점심을 먹으로 갔으면 어땠을것 같니" "지금은 운명을 믿어 톰, 니가 옳았어."
책에 대해 물어왔다는 한마디속에는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데 특히 이 부분은 영화초반, 톰과 썸머의 첫 대화장소였던 엘레베이터 장면과 완벽하게 교차 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톰이 듣고 있던 음악에 썸머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다가갔을때 톰이 느꼈던 운명은 책을 읽고 있던 썸머에게 그 남자가 같은 방식으로 다가갔을때 썸머가 느꼈을 운명과 철저하게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영화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톰도 이별이후 많은것이 변했습니다. 운명이 오는걸 굳이 기다리는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운명이 되어 누군가를 찾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죠. 마지막 나래이션 부분을 어떻게들 판단하실지 모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나래이션이 결론을 지으려는 찰나에 톰이 그것을 끊어버린걸로 들었습니다.
즉 나레이션에서 "모든건 우연이고 필연적인건 없다. 그리고 톰은 그걸 확신했다" 이렇게 말하고 다시 나레이션이 톰에 대해 언급할려던 찰나에 톰은 말을 끊어버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여인에게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나래이션은 약간 자신없는 목소리로
"톰은 거의 확신했다(pretty가 들어간)"는 말로 바뀌어서 나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톰이 운명따윈 이제 안믿는다가 아니라.
이젠 자신이 운명이 되어 누군가를 찾아가겠노라고 다짐한걸로 느껴졌습니다.
내 여자를 사랑한다는건 내 여자가 사랑하는 것들 또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걸 이 영화를 통해 다시한번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연애를 하시는분들, 그리고 앞으로 연애를 시작하실 분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관람하세요. 그리고 부디
이 영화에서 Bitch와 운명에 대한 회의감만을 건지는 안타까운 결과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평범해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랑이야기의 근원이 담겨있습니다.
500 Days Of Summer -2009
ps.재관람이후 추가된 내용이 좀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관람이 흥미로우셨다면 재관람 역시 탁월한 선택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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