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와 메종 드 히미코를 감독한 이누도 잇신씨가 메가폰을 잡았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관심이 갔던 작품이다. 매우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붉은 옷을 입은 세 여배우의 포스터 이미지는 이 영화가 핏빛드라마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누도 잇신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볼때 어두우면서도 좀 칙칙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 작가의 소설이 어울릴 것인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에 흐르는 따뜻함(혹은 치유와 극복)과 삶에 대한 낙관주의적 요소가 원작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상 감상에 들어가니 이누도 잇신 감독은 나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충실하게 미스테리물을 재현해내고 있었다.
1. 성장하는 배우 료코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커다란 인상을 받았던 점은 히로스에 료코라는 배우의 연기가 매우 발전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나왔던 그녀의 필모그래피의 영화를 보면 그녀의 연기가 그렇게 도드라져 보였던 작품은 별로 없었다. 그녀가 그간 보여주었던 이미지는 상큼하고 발랄한 아이돌 이미지이거나 청순가련형 타입 , 소극적인 타입의 캐릭터 유형이였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이미지는 매우 절제된 이미지를 지녔지만 주변의 방해를 무릎쓰고 끝까지사건을 파헤치는 캐릭터이다.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철부지 아가씨이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에 휘말려 성장하게 되는 데이코(히로스에 료코)는 사건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관찰하면서 영화의 흐름을 주도해나간다. 료코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과장된 밝은 이미지와는 다른 주인공의 어두운 내면과 불안을 미세하게 잘 연기하고 있다. 범인이 바로 앞 단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행동고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는 그녀의 연기는 이 영화가 그녀를 위한 영화였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2. 긴다이치 코스케가 된 데이코
만화 김전일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주인공 김전일이 틈만 나면 주야장창 늘어놓는 긴다이지 코스케는 일본 추리계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캐릭터이다. 데이코는 탐정처럼 사건을 이리저리 파헤치며 관객의 호기심을 가중시키는 캐릭터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료코가 탐정역할을 해서 비슷하다는 게 아니라 이 영화의 표현기법이 상당히 크로테스크하다는 점이다. 범인에게 살해당할때의 표정들이 매우 엽기적이며 죽을때 클로즈업되는 표정들도 70년대 이치가와 곤 감독의 이누가미 일족(혹은 ATG 영화)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누도 감독은 원작을 최대한 살리고 과거의 일본영화들의 기법을 차용해서 미스테리적 공포감을 극대화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영화를 창조했다기보다는 전통적인 미스테리 공포물의 컨벤션을 충실하게 수행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3. 기대이상의 효과를 주는 음악
우선 이 영화가 미스테리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게 음악이였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스코어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서 공포감과 긴장감을 관객에게 전해주고 있다. 데이코가 잃어버린 남편을 찾으러 기차를 타고 가는 씬에서의 음악과 기차의 움직임이 어우러져 마치 빨려드는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매우 몽환적인 스코어인 동시에 애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어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데이코의 불안과 슬픔을 극대화해서 표현해주고 있다.
4. 제로에 대한 욕망
겐이치는 히사코를 버리고 새로운 아내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며 사치코는 팡팡걸이였던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현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한다. 앞의 두인물과는 달리 데이코는 남편과 결혼해서 제로의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반면 히사코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겐이치에게 속고 친구인 사치코에도 속아서 제로의 나락으로 떨어질 지점에 있다. 이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제로의 지점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제로의 지점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점(히사코와 데이코는 예외)이 아닌 과거의 기억이 제로가 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겐이치는 거짓 자살을 위장했고 사치코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모든 이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히사코와 데이코를 희생시켰다. 제로로 가고 싶은 인간들의 추악함과 슬픔을 절제된 마음으로 파헤쳐나가고 관찰하는 데이코의 얼어붙은 시선이 얽히고 얽힌 이들의 슬픈관계만큼 나를 슬프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헀다.
5. 마무리
이누도 잇신 감독의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맛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만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들에서 자주 보였던 시련을 극복한 인물들의 치유와 극복이 이 영화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누도 감독의 미스테리 공포물의 완성도는 예상외로 수준급이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미스테리공포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왠지 더 애잔하고 더 인간적인 인물의 아웃라인과 휴머니즘에 대한 믿음이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에서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가 감독할 새로운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