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격정멜로. 두려움 없는 사랑.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사랑의 열병.
이 영화에 대한 마케팅 문구는 상당히 자극적이어서, 비슷한 시점에 개봉한 '비밀애' 라던지
예전에 개봉한 '정사', '중독' 같은 류의 위험하고 격렬한 사랑 따위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혹은 에이즈에 걸린 남녀의 마지막 사랑이니까 눈물이 철철 흐르도록 슬픈 세련된 모양새의
신종 신파 따위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남길의 인터뷰에서,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 때문이었다.
"손이라도 잡고 싶었어요."
젊은 남자 배우가 그냥 농으로 던지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작품에 대해서 뼈 없는 말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연기에만큼은 진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개봉도 하기 전에 시사회에서 폭풍전야를 보게 되었는데, 그 분위기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첫 장면부터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어체 대사를 글자 그대로 말하는 상병과 그 애인 역 때문에 그렇기도 했고,
마술쇼를 하면서 '지상 최하의 마술쇼' 라고 써붙이는 것이라던지,
'우리를 믿습니까?' 라고 써놓은 것을 보면 키득키득 실소가 나올 만도 했다.
김남길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분위기는 똑같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가 화면 가득히 등장했을 땐,
'비담' 김남길이 돌아온 것에 대해 약간의 환호까지 있었다. (극장인데도!)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밤길을 걸어,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에야
이 작은 유머 코드들이 감독이 넌지시 던지는 지독하게 슬픈 농담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을 지상 최하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마술사. 참 자학적인 문구다.
그리고 우리를 믿느냐는 마술사의 말은, 속임수를 쓰는 마술사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상병이 코믹하게 부르짖었던 '콘돔~!' 역시, 에이즈 감염자들에게는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아닌가.
감독의 이런 짖궂은 농담들이 곳곳에 숨어 있고,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연극적 발성의 연기들이 이어졌지만.
김남길이 등장하는 한 씬, 한 씬, 소리는 잦아들었고... 질박한 느낌의 배경음악이 잠깐 나오다가
순간 파도 소리만 남고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장면이 올 때는 모두 숨을 죽였다.
폭풍전야.
그 때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폭풍전야인지를.
곧 다가올 무서운 폭풍 앞에, 바다는 무서우리만치 고요하고 슬프리만치 잔잔하다.
폭풍전야라는 원래의 뜻, 그 자체가 이 영화라는 것을.
마술사 상병. 그리고 그의 동성 애인은 여자 조수 미아와 함께 마술쇼를 다니며, 한편으로는
바닷가에 작은 카페를 열기도 했다.
사랑에 적극적인 여자, 미아는 상병을 사랑했지만, 상병은 미아만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상병과 그 애인의 관계를 알게 된 미아가 우발적으로 총으로 그 애인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얼마나 급하고, 적극적이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여자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상병의 애인은 죽고, 상병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으로 간다.
그리고 미아는 조용한 여자가 된다.
감독은 길을 잃은 이 여자에게 '미아(迷兒, 길 잃은 아이)' 라는 이름을 붙였다.
요리사 수인은 에이즈에 걸리면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말에 상병의 피를 통해 스스로를 감염시킨다.
하지만 그건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우스운 해프닝. 작은 오해 하나로, 수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생을 가둬버리게 된다.
어쨌거나 수인은 누명을 벗기 위해 복수를 다짐하며 살인자를 찾아가지만, 이미 살인자는
하느님 앞에 혼자서 회개해버렸다.
게다가 자살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벌하고 수인에게 복수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수인은 이제 갈 곳을 잃고, 상병이 찾아가달라고 말했던 그녀, 미아에게로 향한다.
감옥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던 남자. 그리고 이제는 에이즈라는 병에 갇힌 남자,
'수인(囚人, 수감자, 갇힌 사람)'이라는 이름.
전도연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살인자.
가족을 죽이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죽여도 시원찮을 그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그녀는 종교를 가지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복수의 방법으로 '용서'를 들고 찾아간 그녀의 앞에 살인자는 말한다.
'이미 하나님이 용서하셨다' 고. 이보다 기막힌 일이 있을까. 속된 말로 이런 뭐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어째서 피해자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처를 받았는데 가해자는 회개하고 구원받는단 말인가.
이럴 거라면 함무라비 법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를 적용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사실 현대 법이란 것은 점차 범죄자를 옹호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양'과 '폭풍전야'의 상황은 매우 비슷하지만, 대응하는 방법은 다르다.
수인은 울지 않는다.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저 망연자실, 바닷가에 앉아 거센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다.
파도에 온 몸이 젖어도, 그는 얼굴조차 찡그리지 않는다.
그런 사소한 번거로움이나 고통을 보여줄 만한 여유가 없음을, 젖은 머리카락과 메마른 눈으로 보여준다.
그런 그를 본 미아는 바닷가의 파수꾼 역할을 대신해왔을 법한 마이크를 들어 말한다.
"자살금지구역이오니 다른 곳을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식, 웃게 만드는 깜찍한 멘트가 아닐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살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미아가 사색을 즐기는 철학자가 아닌 이상에 가능성은 두 가지다.
그 곳에서 이미 누가 자살한 적이 있거나, 그녀 자신이 그 곳에서 자살을 고민했거나.
그런 공감을 가진 두 사람이 카페 류트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미아는 정말로 조용했다.
애인의 외도에 총을 집어들고 달려가는 여자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그리고 수인 역시 점점 더 조용해져갔다.
불치병에 스스로 걸려 탈옥을 계획한 살인 용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다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둘만의 시간.
설명이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둘의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사실은 관객들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끼고, 의미들을 곱씹는 단계다.
왜 저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지, 왜 저 여자가 손을 내미는지, 왜 여자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잠깐 해보는 거예요. 빼면 해고할 거예요." 라고 농담처럼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대는지.
둘이 섬을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 케이블카에서 미아는 또 선을 긋듯이 말한다.
"나 참 좋은 사장님이죠?" 라고.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이 어디쯤 와있을 것이라는 건, 사랑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을 사랑해본 사람, 아니 사랑해도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 서로의 마음을
분명히 알지 못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지금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한 눈에 알아챌 것이다.
영화는 아주 작은 신호들로 이런 감정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이 신호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의미들을
반밖에는 즐기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나이를 차별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도 애끓는 사랑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좀 더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그런 사소한 추억들로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슴을 두드리는 영화다.
어쩌면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귈래?" 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요즘의 어린 친구들에게는
이해가 안될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청소년관람불가로 결정된 것은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한참 영화를 보고 있는데, 한자로 씌여진 여관의 이름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여관.
왜 살고 있냐는 수인의 물음에 "이웃이 없으니까요."라고 미아가 대답한 여관의 이름은
'연장(然莊, 그러한 여관)'이었다.
감독의 작명 센스에 감동한 터라, 이마저도 숨은 의미가 없을까 궁리해본 결과, 동음이의어인
'연장(延長, 길게 늘림)'인 것도 같다.
홀로 남겨진 미아의 삶을 연장해준 곳. 수인과 미아의 사랑을 조금 더 연장해준 곳.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
더 그랬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은 없이, 새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아, 새가 날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테지만, 두 사람에게도 그럴까.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그저 각자 손을 모은 채로 그 새를 멍하니 바라보는 두 사람은
아마도 그렇게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서서 두 팔을 편다면 얼마든지 날아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위태로운 절벽이라는 촬영 장소를 고른 감독의 선택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영화가 막바지로 치달아도, 여전히 수인과 미아의 눈은 메말라 있다.
그리고 여전히 고요하고, 서로에게서 한발짝 떨어져 있다.
마치 두 손이 뒤로 묶인 구속복을 입고, 입가리개를 한 채로 눈빛만으로 사랑을 말하는 듯한 두 사람.
에이즈라는 병이 그 구속복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손조차 내밀 수 없는 이상한 사랑.
누구나 사랑하면 함께할 수 있는 입맞춤을, 포옹을 하는 것조차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버리는 괴상한 병.
"손이라도 잡고 싶었어요" 라는 말에는 "...하지만 잡아서는 안됐어요." 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마지막에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매일매일 치르던 전야제를 끝내기로 하는 두 사람의 애타고도 허망한 마음이
바스러져 내리는 그 밤.
너무도 간절하고 슬픈 그 장면을 홍보를 위해 '격정적인 베드신' 따위로 포장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조창호 감독의 각본, 감독 영화는 처음이지만, 그가 김기덕 감독과 오래 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떠오른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그저 한꺼풀씩 벗겨 보여주는 느낌.
유독 한국 관객들은 대사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는, 특히 아침드라마, 저녁 드라마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대사가 많다.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해설하느라고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고 구사하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들인다.
전쟁, SF, 코믹, 판타지, 예술영화 모든 장르에서 늘 개연성과 '이야기'를 요구하는 한국 관객들 덕분에,
한국영화는 미술, 조명, 의상, 음악, 특수효과 같은 것들보다 배우가 좌우한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엔 스태프들의 역할도 엄청나게 중요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누구누구의 미술연출' 때문에
영화를 보러 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폭풍전야 역시 배우의 힘이 적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배우들은 상황이나 감정을 설명하려고 입을 열지는 않는다.
대사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없고, 표정도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없다.
그럼 그토록 격정적인 사랑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김남길의 연기가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이런 면에서였다. 어떤 트릭도 없고 기교도 없는 영화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작은 손짓들이었다.
황우슬혜의 연기는 말하기 힘든 묘한 구석이 있다. 마치 풍차 같다고나 할까.
바람이 낮으면 천천히 돌고, 바람이 높으면 빨리 돈다.
상대성이 있는 그녀의 연기는 김남길과 함께 하면서 점점 더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증폭된다고 해도 그들의 표정에서 흐느낌이나 눈물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꼭 눈물을 흘리거나 울부짖어야만 슬픈 것은 아니니까.
마치 동물들처럼, 미래를 직감한 듯 깊고 검은 눈으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픈 영화였다.
폭풍전야의 화면들은 여느 영화와 달리 개연성이나 연결성을 보여주지는 않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툭툭 끊어놓은 듯하다.
매 장면들이 제주도의 비와, 바람과 햇살과 어울려, 영화라기보다는 아름다운 풍경화들의 슬라이드 쇼처럼
차곡차곡 펼쳐졌다.
그런 슬라이드쇼를 보고 난 뒤여서일까. 이 영화 폭풍전야는
어느 낯선 미술관에서 만난, 큐레이터의 설명 없이 그저 가슴으로 느끼게 되는 무명화가의 미술작품 같은 느낌이 든다.
보통 미술관에서는 이미 유명한 작가의 작품 앞에서 큐레이터가 빠르게 설명한다.
화가의 배경, 그림의 동기, 등장인물의 뒷이야기, 그림의 크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림의 가격...... 하지만 유명한 사람이 그렸든, 가격이 몇십억이 되든, 그림은 어떤 설명도 원하지 않는다. 같은 그림을 바라보는 100년 전 백작부인과 내가 꼭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100년 후 남미의 한 소년과 내가 똑같은 느낌을 공유할 수도 있는 것이 그림이기 때문에.
봄여름가을겨울, 사마리아 등 영화에서 음악을 맡은 지박(Ji Bark) 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갤러리에서,
'수인'과 '미아' 라는 이름의 그림 전시회를 감상하고 온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한 번 더, 시간이 지나서 과연 그 느낌들이 그 때와 똑같은지를.
매 초마다 하루하루 미래로 다가가는 자신의 마음이,
이 영화를 처음 볼 때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지를 가능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아마 두 번째, 세 번째 이 영화를 볼 때면, 난 몇 시간쯤, 며칠쯤 더 늙어 있을 거고.
수인과 미아처럼 폭풍을 맞이할 준비도 없이 지내버린 시간들이 못내 아쉬워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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