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D 관람평입니다 -
사극은 나라와 시대를 막론하고 오랜 시간 사랑 받아 온 장르지만, 여기에 부담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유의 방대함과 진지함 때문이다. 분량으로 따지면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서사극의 대부분이 2시간 반을 넘나드는 러닝타임을 자랑하고, 우리나라의 대하사극들 역시 50부작 이상의 장거리 레이스를 주로 달린다. 그러다보니 한번 빠지게 되면 대단한 중독성을 자랑하면서도, 그 방대함과 진지함 때문에 다가가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꽤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사극의 형태를 띠고서도 현대극 못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퓨전 사극 장르가 많이 등장했고 이제는 정통 사극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할리우드에서도 2000년 <글래디에이터>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대규모 역사극의 시대가 다시 오는가 싶더니 점점 반응이 예전만 못해지면서 요 근래는 한동안 잠잠했다. 그래서 불현듯 등장한 <타이탄>이 어떤 개성을 지니고 있기에 용감하게 모습을 드러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탕이 다른 것도 아니고 그리스 로마 신화다. 스케일이 인정사정 없기로 소문난 그 신화 말이다. 그리고 비교적 영리하게도 <타이탄>은 이 엄청난 규모의 원재료를 갖다가 팝콘 무비처럼 활기 가득하게 요리해냈다. 역사극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가볍게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1시간 50분도 되지 않는, 이런 장르의 영화에 있어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한 러닝타임 속에서 이 영화는 여러 면을 보여주는 진중한 서사극이 되기보다 짜릿한 스릴 제공에 주력하는 롤러코스터의 길을 택했다.
타이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제우스(리암 니슨)는 인간을 창조하여 그들의 기도로 신들이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한다. 제우스는 하데스(레이프 파인즈)가 자신의 살점으로 창조한 거대괴물 '크라켄' 덕분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를 속이고 그를 지하세계로 내보내고, 하데스는 결국 형제인 제우스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나간다. 한편 신들의 능력을 점점 의심하던 인간들은 급기야 신과 정면승부하기로 하고, 아르고스는 군대를 동원해 신과의 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하데스가 나타나 한바탕 하고는 그렇게도 신보다 아름답다는, 아르고스 왕의 딸 안드로메다(알렉사 다발로스)를 열흘 안에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인간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한편, 바다에 버려진 채 어부에게 발견되어 길러진 청년 페르세우스(샘 워싱턴)는 하데스의 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는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을 평생 지켜봐왔다는 신비로운 여인 이오(젬마 아터튼)에 의해 자신이 실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고보니 반인반신이었던 페르세우스는 졸지에 인간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 되고, 처음엔 주저하던 그 역시 자신의 가족을 앗아간 신에 대한 증오심에 힘입어 하데스를 물리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인간이었던 그에게 앞으로는 신만이 줄 수 있을 규모의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등장한 서사극 중에서 보기 드물게 <타이탄>은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서사극 특유의 무게감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실망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부담없는 스펙터클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상당히 만족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106분이라는 서사극 치고는 꽤 짧은 러닝타임 안에 대장정을 담아내면서, 스피디한 전개와 파워풀한 액션에 주력한다. 특히나 액션 장면은 보통 서사극하면 떠올리게 되면 대규모 군중 전투신같은 것이 아니라, 거대괴물과의 일대일 대결, 추격전 등 오락용 액션영화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타격감과 스릴을 제공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하면 떠올리게 되는 도저히 감이 안잡히는 규모의 이야기와 스케일을, <타이탄>은 의외로 콤팩트하면서도 힘있게 그려낸다.
이것은 분명 제작진이 의도한 것이었을테다.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는 하도 많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있어서 복잡다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다, 반인륜적인 요소가 꽤 많기 때문에 여기에 정색하고 달려들었다가는 꽤 엄한 분위기의 영화가 탄생할 수 있다. 때문에 제작하는 측에서는 이 소재의 오락성에 비중을 두어 진지하지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정통 서사극 대신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팝콘무비로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감독이 서사극에 정통한 거물급 감독이 아니라 <트랜스포터>, <더 독> 등 액션영화로 명성을 쌓아 온 루이스 리테리어 감독인 것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도 전편에서 많이 싱거웠던 액션에 확실히 힘을 실어줬던 그는 <타이탄>에서도 본연의 실력을 발휘한다. 거대전갈과 페르세우스 일행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싸우는 장면은 근접촬영을 통해 긴장감과 타격감을 극도로 살리고, 메두사와의 결투에서는 미끄러지듯 하는 느낌의 추격전 느낌도 살려낸다. 크라켄과의 대면 장면에서는 전통적인 스펙터클 과시도 빼놓지 않는다. 나름 멋드러지게 느껴지는 슬로 모션 장면도 틈틈히 활용함으로써 감독은 영화 속 액션을 최대한 박력 있고 스타일 있게 그려내는 데 주력한다.
신화 속 세계를 묘사하는 데도 망설임 없다. 앞서 똑같이 페르세우스가 주인공이었던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이 카피에서는 '거대한 신들의 전쟁'을 들먹거려놓고는 실은 물탱크 몇 개 깨부수는 것 정도로 끝냈던 데에 비하면 <타이탄>은 진짜 전투를 보여준다. 아무래도 신화 속 세계의 모티브가 현대와 간접적으로 접목된 것이 아닌, 신화 속 세계 자체를 그리다 보니 그렇다. 신들이 한번 위력을 뽐내면 그 수준은 가늠하기 힘들고, 그들이 만들어낸 생명체 또한 전체 크기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또한 제우스에게는 샤방샤방한 효과를, 하데스에게는 텁텁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심어줌으로써 캐릭터마다의 성격을 분명히 한 점도 돋보인다. 즉 신화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리얼리티보다는 분명한 개성에 더 주안점을 둔 것이다.
<타이탄>이 집중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꽤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들이 집중하는 것이라면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배우들의 연기는 다소 포기하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대장정을 110분도 안되는 러닝타임 안에 담다 보니 이야기에 비약이 있다. 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보다 그때그때 전투에 더 집중하다보니 관객의 눈은 즐겁지만 심리까지 조이는 데는 힘이 부친다. 중요한 갈등이 등장할 새도 없이 주인공의 다음 모험을 위한 여정이 준비되고, 주인공과 일행들은 그 여정에 충실히 임할 뿐이다. 신과 인간의 전쟁 속에서 희생된 페르세우스가 품게 되는 증오 또한 그가 여정에 나서게 하는 원동력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하는 듯 하다.
이렇다 보니 굵직한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연기는 비교적 평면적이다. 페르세우스 역의 샘 워싱턴은 여전히 강인함과 여림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사나이의 이미지로 잘 어울리지만 새롭지는 않고, 제우스 역의 리암 니슨과 하데스 역의 레이프 파인즈의 연기도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정도의 기능만 보여준다. 특히 영화를 보다 보면 배우 때문인지 특정 영화와 이미지가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페르세우스가 누구도 타 보지 못했다는 페가수스를 타는 장면에서는 <아바타>의 '토루크 막토'가 떠오르고, 쉰 목소리로 자신의 힘이 커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데스의 모습에선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연상되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꽤 마음에 든다. '팝콘 서사극'이라는 독특한 정체성 때문이다. <타이탄>은 철저히 대중의 기호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장엄한 스펙터클은 원하되 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무게감은 원하지 않는 관객들, 고전물을 통해 품어왔던 상상을 현대적으로 스타일리쉬하게 만끽해 보고 싶은 관객들을 위해서 말이다. 서사극이라는 본래 정체성에 너무 얽매여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이야기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대신, 영화는 감이 안잡힐 것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의 한 토막을 부담없는 액션활극으로 발랄하게 재현해낸다. 그리고 액션 장면 구현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을 통해 액션은 꽤 볼만하게 짜여진다. 무언가 깊은 메시지를 찾는 것은 힘들지만, <타이탄>은 우리가 예전에 신화나 여러 고전물들을 접하면서 느꼈던 광활한 상상을 부담없이 유쾌하게 형상화해내는 역할을 충실히 다한다. 정통 사극으로서의 무게는 웬만큼 버리면서, 액션물과 같은 스릴과 타격감은 확실히 취하는, <타이탄>은 취하고 버리는 것이 분명한 나름 '퓨전 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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