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나라촌평 :
<아무도 모른다>의 코레에다 히로카즈와 배두나가 만났다?
기본으로 작품성은 인정받을 수 있을 감독과 배우가 만난 셈이니,
우선 영화 자체는 볼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국내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일본 영화이기에,
국내의 정서와 얼마나 호응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영화 잘 만든다는 감독이 만든 영화가 기대감은 있었다..
감독이 보여줄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의 씁쓸한 사회상일까?
아니면, <걸어도 걸어도>의 색다른(?) 어머니상일까?
Q)인간성과 순수를 노래하던 '인형의 꿈'이 처키가 되다,,
이 영화는 한 남자가 소유하고 있던 공기인형이 마음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들과 소통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 속 마음을 갖게 된 공기인형은,
마치 피노키오처럼 생각을 하게 되고, 감정을 갖게 되고,,
타인과 교류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주인은 모르게 말이다;;)
그렇게 교류를 쌓아가며 공기인형은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인,
자신으로써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것들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과 그 속의 순수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역시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타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아무도 모른다>식의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영화였다는 점이다..
그것을 어찌 알았냐구?
이 영화는 그 메시지를 대사로 직접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 인간들과 교류를 해가던 공기인형이 만난 할아버지는,
인생이란 속이 텅 비어 있고,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라며 텅 빈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은,,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채워야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관계인 인간들은,
그것을 채워주지 못해 여전히 텅 빈 삶을 살아가고 있다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정말 정곡을 찌르는 감독의 메시지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사가 나오면서,
정말 선뜻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공기인형외 인물들의 등장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었다..
영화에 공기인형외 인물들은 모두 결핍되어 있는 인물이다..
공기인형의 주인은 타인과의 관계가 싫어 공기인형에 집착하고,
착한듯한 DVD숍 주인은 욕망 덩어리 였으며,,
공기인형의 환대를 받았던 여자는 컴플렉스 덩어리,,
공기인형의 최후를 본 여자는 거식증에 걸린 히키코모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기인형의 사랑을 받은 남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졌던 인간이었다..
모두들 타인과의 관계에 걸린 인간군상이었던 셈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공기인형은 조금씩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공기인형의 영향도 그들을 바꾸지는 못했다..
결국 지금의 우리들이 절대로 바뀔 수가 없듯이 말이다..
이 영화는 꽤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감정적인 기복이나 큰 사건이 존재하지 않아,,
잔잔한 냇물처럼 흐르는 영화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냇물에도 큰 파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영화의 결말부 부분이었다..
'인형의 꿈'을 노래하던 공기인형이 처키가 된 느낌이었다랄까?
감독이 선택했던 영화의 결말부는 조금은 불편한 결말이었다..
어떻게든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질 수 없는 소재요, 이야기였지만,,
다른 모든 요소들이 거세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랄까?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런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영화의 결말부는 쉽게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확실히 불편했다..
그러나 그 전까지 감독이 끌고 가는 메시지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Q)코레에다 히로카즈, 인간성에 대한 씁쓸함을 곱씹다,,
코레에다 히로카즈를 유명하게 만든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다..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유기된 채 살아간 남매의 실화였던,
<아무도 모른다>는 씁쓸한 감동과 함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 대한 상념에 잠기게 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감독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겼나 보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인간의 본성을 우선 생각한 것을 보면 말이다..
감독은 인간은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다..
인간이 순수성을 잃는 건, 환상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영화 속 공기인형의 존재를 모두가 거부감 없이 보는 것처럼,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라고..
감독은 그렇게 관객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새롭게 배워가는 공기인형을 보며,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보는 그대로 배우고, 본인 생각대로 잘해주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순수를 잃어버린 지금의 우리에게는,,
영화 속 공기인형의 그런 모습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형이라 손이 찬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따뜻할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던 공기인형의 그런 모습 말이다..
처음에는 공기인형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 영화의 관람등급이나 내용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거의 초반부부터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런 것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부분은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결말부에서 틀어졌던 점은,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곱씹어 보면, 결말부에 대한 실마리가 전반부에 있기는 했었는데,,
그것만으로 모든 결말을 짜 맞출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못 만들어진 영화는 분명 아니지만,
모든 관객들이 공감하고 호응할 수 있는 영화도 분명 아니었다..
그 적정한 경계선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조금은 많이 우려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Copy Right™, 매니악's 적나라촌평
출처 : http://www.cyworld.com/csc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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