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끼치고 수치스러운 순간들의 연속....★★★★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2003년 9월, 37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송두율 교수를 둘러싸고 이 땅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의 모습이. <경계도시 2>는 당시에 벌어졌던 아비규환의 모습을 반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개입과 방관의 중간지점에서 차분히 지켜보고는 평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명백히 카메라가, 아니 감독이 “왜 노동당에 가입했느냐?” 아니 “왜 노동당 가입을 사전에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지 않은 것은 대단한 인내심의 발휘요 윤리적으로 옳은 입장이라는 점을 전제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이 리뷰는 영화 자체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송두율 교수 사건과 관련한 사견에 더 가까울 것이다.
송두율 교수의 귀국과 구속, 이후에 벌어진 재판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당시 내 입장을 먼저 말한다면 일종의 방관이었다. 진보를 내세운 민족주의자들의 헛발질 정도의 판단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단적으로 말해, 송두율 교수하고는 좀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남한의 민주화 활동을 하는 인사가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북한 노동당 입당, 그 자체만으로 처벌한다는 것도 좀 우습다고 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럽, 특히 독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의 경우엔 이런 문제가 좀 복합하게 얽혀 나타나는 것 같다. 예전에 유학생 간첩단 사건 연루자들의 글 등을 보면, 60~70년대 독일 유학생들의 미묘한 감정이 잘 담겨져 있다. 오래 전에 읽어서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정리해 보면, 남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모든 면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낫다는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막상 외국에 나가보면 정반대의 현실에 당황하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컬러 인쇄 능력이 안 돼 조잡한 흑백 인쇄물 밖에는 없었던 남한에 비해 소위 총천연색 인쇄물의 북한 홍보물을 봤을 때의 충격. 그리고 실제로도 북한의 경제력은 당시엔 남한보다 우세했다고 한다.
거기에 독일의 베를린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동서독을 넘나들 수 있었고, 그러한 현실은 조국의 분단 현실에 대한 더 큰 참담함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인들은 북한의 경제발전을 대단한 것으로 평가해주기도 했고, 유학생 입장에선 그것을 일종의 한민족에 대한 우수성으로 받아들여 자부심을 갖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다고 한다. 자유롭게 동독을 방문할 수 있는 여건에서 북한 쪽 인사와의 접촉은 어느 정도는 계획적으로 또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고, 유학생이 보기에 ‘별 것 아닌 사소한 만남’이 거대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외국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독일에 가면 대부분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좀 더 솔직히 말해보자.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사람, 더 구체적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 살 수 없으며, 들어올 수 없는가? 모든 국민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체제의 국가를 현실에서 찾아 이동해야만 하며, 그러한 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대한민국 내에선 불가한 것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경계도시 2>는 결단코 이 땅의 수구 꼴통들을 향해 소리치고 조롱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들에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스스로를 소위 ‘진보’ 내지는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향해있다. 영화는 소위 ‘진보’가 왜, 어떻게 송두율 교수를 에워싸고 윽박질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송두율 교수가 평생 지키려 애쓴 그의 사상이나 삶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고, 진보인사들에게 중요한 건 눈앞에 닥친 총선 승리이거나 알맹이 없는 대한민국 진보의 미래다. 이를 위해 그들은 사실상 보수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송두율 교수가 알몸 투항하기를, 백기 항복하기를 권유(압박)한다. 소름끼치고 수치스러운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경계인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거의 동일한 논리로 보수와 진보는 송 교수의 경계논리, 경계인에 대해 비판한다. 아무리 화려한 논리와 언어를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비판엔 결국 남과 북,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정의(!)가 전제되어 있으며, 남과 북, 둘 다를 선택한다거나 또는 둘 모두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강제가 많은 국외 인사들을 오히려 친북 쪽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점수로 객관화시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모습은 마치 20점 맞은 학생이 70점 맞은 학생에게 “100점을 맞겠다는 약속을 왜 지키지 못했느냐?”며 윽박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알몸으로, 백기로 투항하면 이 땅은 관용을 허하는가? 국가보안법의 발톱은 상대가 등을 보이는 순간, 덤벼들어 생채기를 내고, 물어뜯으며 끝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맹수의 본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내가 영화에서 본 건, 바로 그러한 법 체제의 유지가 가능한 우리들 속의 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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