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 투명하게 파악하는 걸 어려워 한다. 언제나 나라는 존재를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가끔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보다 오히려 더 나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다 분명한 자각을 위해 때론 외부 존재의 등장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내가 아닌 타인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속한 공동체 외부에 있는 이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 관찰하기 위해, 영화는 여기에 때로 인간이 아닌 존재를 동원한다. 판타지의 색채를 곁들여 그것은 때로 로봇이 되기도(<바이센테니얼 맨>, <A.I.>), 인간이 되다 만 존재(<가위손>)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따지면 이 <공기인형>이란 영화도 판타지가 섞인 영화다.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느낌이 확 다가오게도, 여기서 인간을 관찰하는 대상은 인형이다. 그것도 '성욕 해소를 위한 대용품'으로서 사용되는 공기인형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에로틱한 분위기가 흐르는 판타지 로맨스 같은 영화일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감독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런 예상을 살짝 물르게 된다.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현대 사회가 흘러가는 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 오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노선을 달리던 최근 몇 작품(<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과 달리 판타지적 설정을 곁들인 이 영화는,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끊임없이 얘기하고자 했던 것을 여전히 이야기한다. 소통이라는 행위의 가치에 대해서 말이다. 당장 현실의 문제로 와닿진 않더라도,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고요하게 우리를 설득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히데오(이타오 이츠지)가 연인 대용품으로 싼 값에 구입한 공기인형 노조미(배두나)는 어느날 생명을 얻게 된다. 인간처럼 보고 듣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내 처박혀 있던 방 안을 벗어나 노조미는 히데오가 출근한 사이에 집을 나와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첫 경험들이다. 그러던 중 들어서게 된 DVD샵에서 노조미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준이치(아라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모집중이라는 것을 안 노조미는 가게에 취직하고 매일 그곳에서 준이치와 함께 일한다. 자신이 인형이라는 것을 숨긴 채 노조미는 이중생활을 이어가는데, 하루하루 살다보니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속이 텅 비어 있음을 알아간다. 그러던 중 우연한 사고로 준이치는 노조미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만다. 그러나 거부하기는커녕 바람이 빠져가는 노조미에게 오히려 숨을 불어넣어주는 준이치. 노조미는 자신 또한 공허해 하는 듯한 준이치에게 숨결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있는 일본 감독의 영화에 우리나라 배우가 투톱도 아니고 원톱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만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심지어 영화는 그 배우로 하여금 이제까지 보여준 것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연기를 뽑아냈다. 배두나는 이 영화를 만난 것을 매우 행운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배우로서의 고정관념에선 살짝 벗어난 이미지로 늘 개성을 추구해왔지만, 이 영화만큼 명징한 캐릭터가 되어 나타난 적은 없었다. 감독은 어느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캐릭터를 배두나에게 선사했고, 그녀는 그 캐릭터를 더도 덜도 나가지 않고 딱 그녀에게 맞추어진 옷처럼 완벽하게 연기했다. 아름다움과 공허함, 순수함과 우울함을 모두 품고 있는 그녀의 연기는 영화가 지니고 있는 공기와 전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수차례 노출이 등장해도 야하다기보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섬세함이 가득하다. 일본에서도 여러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데, 이것이 한국영화였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단연코 온갖 영화상의 여우주연상 후보로 유력했을 것이다.
물론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만족스럽다. 노조미의 마음에 사랑의 싹을 틔우게 한 청년 준이치 역의 아라타는 무심한 듯 하면서도 은근히 세심한 연기로 노조미와 준이치의 신비로운 로맨스가 꽤 현실적으로 다가오게끔 만든다. 노조미의 원래 주인인 히데오 역의 이타오 이츠지는 자칫 노조미를 탐하는 변태남처럼 비춰질 수 있는 캐릭터를 유머러스함과 비애감이 뒤섞인 연기로 풀어냄으로써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현실에 관심이 없는 듯한 노조미의 제작자 역으로 잠깐 출연하는 오다기리 조는 그가 평상시에 곧잘 보여주는 현실 초탈적 이미지를 어느 정도 끌어옴으로써 영화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인형에게 마음이 생긴다는 동화같은 내용이지만 감독은 역시나 이것을 판타지스럽게 다루지 않는다. 사실 인형이 사람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것만 특이할 뿐,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상황들은 현실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 노조미가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무슨 유별난 변화처럼 표현되지 않고 여느 인간이 아침에 잠에서 깨듯 그렇게 시작된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의심의 눈초리같은 것은 보내지 않으며, 이후 그녀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준이치 역시 별다른 놀라움 없이 '그랬구나' 정도의 반응만 보인다. 우리가 보기에 그녀만 이상할 뿐,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그 전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보기에 매우 평범한 세상을 굉장히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이처럼 <공기인형>이 판타지적인 소재를 들고서도 이를 부풀리지 않고 오히려 리얼리티에 기대는 것은 노조미가 외부인의 시선으로서 바라보는 세상의 단면 역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 느껴진다.
노조미는 여러모로 매우 특이한 위치에 서 있는 캐릭터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처럼 되어버린 인형이라는 점도 물론 그렇지만, 그녀가 어떤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따지고 들어가면 꽤 복잡해진다. 그녀는 애초에 혼자인 이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대용품으로서 만들어졌다.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처럼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문명의 이기를 드러내려는 목적도 아니거니와 <A.I.>의 주인공처럼 인간의 빈자리를 거의 완벽하게 채울 수 있는 '준인간'의 수준도 아니다. 그녀가 사용되는 목적은 1차적으로 성욕 해소이며, 이것은 설사 그녀가 사라지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모델로 교체 가능하다. 감정을 쏟는 대상이 아닌 욕구를 쏟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노조미는 더욱 더 외로운 상황에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녀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바람에, 자신이 정말 외로운 존재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인간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 처한 듯한 노조미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삶은 매우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은데도 꽤 소중한 모습이 된다. 노조미는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조금이라도 더 맺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그녀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산재해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것들이 치고 올라와서 홀로 집에 틀어박혀 미용에만 신경쓰는 여인도 있고, 집안에서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것만 반복하는 폭식증 환자도 있고, 사람보다 가공의 캐릭터에게 열광하는 덕후 청년도 있다. 이런 건 믿었던 관계가 깨지면서 겪는 배신이라는, 인간이어야만 알 수 있는 감정적 변화 때문에 일어난다. 마음이 있는 인간은 그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반작용으로 그 사랑이 좋지 못한 결과로 나타났을 때의 충격은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한 관계 이후에는 한동안 비틀거리고 좌절에 빠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야 그 과정을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해야겠지만, 삶을 살아오며 이러한 아픔을 수차례 겪은 인간들은 안타깝게도 그럴 생각을 하지 못한다. 더 깊은 상처를 얻고 싶지 않아서, 때로는 타인에게로 통할 수 있는 감정의 통로를 아예 봉쇄해 버리기까지 한다. 불필요한 감정의 싹은 갖다버린다. 현재 있는 곳에 구덩이를 파고 침잠해 들어가면서, 그 외로움을 편안함이라고 위안하며 살아간다.
영화 내내 노조미가 심심치 않게 지나치는 쓰레기 수거장은 그렇게 품어지지 못하고 소모되며 버려지는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대한 비유라고 해도 될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길에 쓰레기 봉투를 쌓아놓듯이, 현대인들에게 감정에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애초에 단절시켜버리는 것은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이제야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깨달은 노조미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른 인간들은 일찌감치 진저리가 나버린 감정의 바다에서 노조미는 기쁘게 헤엄치며, 여태까지 기구가 공급하는 공기로 살아왔던 자신을 버리고 타인이 불어 넣는 숨결을 통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렇게만 산다면 마음을 갖는 것이 매우 행복한 일일 것이라 믿었던 노조미를 향해 세상은 불행히도 인간은 그렇게 사는 것이 매우 힘들다며 앞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나를 내주어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기에, 인간은 너무 쉽게 상처입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인형이라면 칼날 같은 상처에 바람만 빠질 뿐이지만, 인간이라면 그 상처에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타인의 숨결로 얼마든지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공기인형 노조미와,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 예민하고 폐쇄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모습을 병치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적막함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다. 정이란 걸 모르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살아가는 듯 하면서도 결국은 각자의 안에 누구에게라도 풀어놓고 싶은 사연들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쁨보다 아픔을 더 많이 겪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선뜻 보여줄 용기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외로워지겠다고 스스로 몸을 웅크리는데, 딱히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화 역시 노조미와 달리 마음의 문을 점점 닫게 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난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성격이라며 받아들일 뿐.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늘 그렇듯, 쓰디쓴 현실에 대해 체념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와중에 누군가는 깨닫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인간이란 혼자 살아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타인의 숨결을 마심으로써 더 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그 소름끼치는 현실 속에서도 결국 웃고야 마는 아이들을 보여주었고, <걸어도 걸어도>에서 무심한 듯 하다가 어느 순간 자각의 불씨를 틔우는 가족들을 보여주었듯, <공기인형>에서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못되게 굴던 인간들이 어느덧 세상이 혼자만 살기에는 알고보면 참 예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차라리 인간의 모습도 공기인형 같다면 감정적으로는 편할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의 숨으로써 내가 살아가고, 설사 상처 입어서 바람이 빠지게 된다고 해도 또 새로운 이의 숨결로 채워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 인간의 속에는 챙겨야 할 부위, 아픈 구석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마냥 텅 빈 상태로 살 수도 없는 것, 영화는 우리에게 조용히 숨을 들이마셔 보기를 권한다. 다시 숨을 마시고 생명을 얻던 노조미처럼, 우리도 바깥세상의 공기를 타인들과 공유하면서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보라고 말이다. '공기인형'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공기인형>이 마지막에 풀어놓는 이 제안은 어느덧 봄바람처럼 가슴 속에 잔잔하게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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