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3범과 뇌성마비 장애인의 멜로. 이창동은 또다시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으로 이미 한국영화의 한 축이 되어버린 그는 [오아시스]를 '판타지 어린 멜로'라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이창동 감독이 풀어놓는 사랑이야기는 위기를 극복하고 맺어진 드라마틱한 사랑도 아니요, 로맨틱한 전개로 점철되는 꿈같은 사랑도 아닙니다. 끝도 없이 사막을 걷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이윽고 발견해낸 오아시스 같은 사랑이지요. 가까스로 해갈하고 다시 길을 가야하는 사랑이지요. 절박함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이창동 영화와 불가분의 관계인가 봅니다.
무언가를 규정짓는 순간, 본래의 다양한 의미는 상실되고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고 이창동 감독은 수차례의 인터뷰에서 강조했습니다. '사랑'이 바로 그러하지 않던가요. [오아시스]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지던 것은, 영화가 우리 안에 부풀어있던 판타지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현실을 움켜쥐고 눈앞에 들이밀던 까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규정해 놓았던 판타지가 부정되고 현실을 직시해야한다는 사실이 보는 이를 괴롭게 했나 봅니다.
홍종두라는 인물은 일찌기 볼수없던 캐릭터이지요. 사회 부적응자로 비춰지고 경우없는 인물로 보이지만, 손상되지 않은 순수를 그 안에 품고있습니다. 설경구의 연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를 연기한 문소리 역시 무어라 이견을 달 여지가 없는 연기를 보여주지요.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를 낙관적이라 평했습니다. 그 진위 여부를 차치한채 그 사실을 대전제 한다면, 그러나 이창동의 낙관은 잔인한 낙관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현실보다 못한 판타지 속에서 자신의 낙관을 읽어내라는 지독한 감독이지요. 일찌기 봐왔던 모든 영화의 판타지보다 [오아시스]의 그 남루한 판타지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게 만드는, 이창동 감독은 마치 사기꾼같은 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