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
개인적으로 내 자신은 시보다는 산문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한 때는 시를 그저 ‘관념적 언어의 유희’ 내지는 ‘젠 척하는 인간들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영화 속 시인의 말처럼 현대는 ‘시를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시>라니. 거기에 인간의 본질을 불편할 정도로 깊숙이 파헤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라는 건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힘든 조건일 터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는 이창동 감독의 이전 작품, <오아시스>, <밀양>에 비해 보는 데 따르는 불편함은 상당히 적다거나 또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추구하는 주제가 흐려졌다는 얘기도 않았다. 오히려 시를 낭송하듯 잔잔함 뒤에 찾아오는 어떤 한 순간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을 제공한다.
영화는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소도시(경기 이천)를 배경으로 한다. 알츠하이머 병 초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66살의 미자(윤정희)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시에서 나오는 보조금과 중풍 든 노인을 간병해서 받는 돈으로 딸이 맡기고 간 손자 종욱(이다윗)을 혼자 키우며 힘들게 살아간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과는 다르게 미자는 문학소녀의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우연히 듣게 된 문학 강좌를 통해 시를 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강물에 투신해 자살한 여중생이 몇 달 동안 자신의 손자를 포함한 친구들로부터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해자 가족들은 대책회의를 열어 일인당 오백만원, 총 삼천만원으로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하려 한다. 이때부터 미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상과 자신이 닥친 부조리한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밀양>이 하늘(이상, 꿈, 믿음)에서 시작해 땅(현실)에서 끝나는 데 반해, <시>는 흐르는 강물에서 시작해 흐르는 강물로 끝을 맺는다. <밀양>이 유괴되어 살해당한 한 아이의 어머니(피해자) 이야기라면, <시>는 성폭행 당한 후 자살한 여중생의 가해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어쩌면 <시>는 <밀양>의 거울이기도 하며, 확장된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좀 더 넓어지고 확장되었다는 건 <밀양>의 모든 것인 하늘과 땅이 <시>에선 이야기 속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자는 희진 어머니(박명신)에게 사과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자연과 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엉뚱함을 보인다. 그리고 뒤돌아서자마자 그 여자가 바로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미자의 곤혹스런 표정은 하늘로 훨훨 날아올랐다가 땅으로 추락해버린, 즉, 현실을 깨달아버린 고통의 표정인 것이다.
김용탁 시인(김용택 시인)은 ‘시는 보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영화는 이를 이미지적으로 표현한다. 영화에서 몇 차례 시 낭송회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보다 종이에 손으로 써내려 간 글씨가 화면 가득 담길 때, 시에 대한 감상은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오롯해진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영화 <시>는 시를 소재로 했고, 시와 관련해 인상적인 장면이 있기는 해도, 전반적인 흐름이라든가 느낌은 시(문학 장르로서의)라기보다는 수필 쪽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이게 딱히 결점이라는 건 아니다. 단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잔한 물의 흐름처럼 영화 역시 잔잔하게 흘러간다. 영화의 가장 큰 사건은 영화 초반부에 마치 일상사처럼 소개되었고, 이후 별다른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 <시>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영화 전체를 감싸고도는 진지한 분위기는 화면에의 몰입도를 유지시켜 준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영화를 보다 뜬금없이 이 말이 떠오른 건, 영화 속에서 전현직 대통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장 첨예한 정치성을 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내가 그런 것을 보고 싶었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니라면 참여정부의 문광부 장관을 역임한 이창동 감독의 경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정확하게는 투신의 이미지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누군가의 투신(죽음)으로 시작해서 누군가의 투신(죽음)으로 막을 내린다(마지막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나는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또 하나 들자면 4대강 사업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선 그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모습조차도 정치적으로 느껴진다)
2009년 5월 23일, 검찰 조사를 받던 전직 대통령이 간략한 유언을 남긴 채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일 년, 공교롭게도 참여정부의 문광부 장관을 지낸 노무현 사람인 이창동 감독은 누군가의 투신으로 시작하는 영화를 선보였고, 같이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진보적 성향의 임상수 감독도 누군가의 투신으로 시작하는 <하녀>를 선보였다. 이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 지도 모르고, 노무현의 투신이 심리적으로 강하게 인장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투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시>의 투신이 노무현을 떠올리게 하는 건 노무현이 조그마한 도덕적 흠집에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노무현을 둘러싼 대부분의 의혹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검찰의 먼지털이식, 창피주기식 수사는 노무현 본인을 포함한 가족들과 관련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노무현이 단골인 식당 주인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지경이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 창피를 아는 인간은 자존심과 존엄이 있는 인간이다. 개인적으로 노무현의 정치적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노무현은 상당히 매력 있는 정치인이었고, 내가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인보다 어떤 면에선 마음이 더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창동은 분명하게 미자를 가해자로 분류해 놓았다. 아무 것도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있고, 그저 어린 손자의 한 때 실수라고 해명할 수도 있지만, 미자는 그 모든 걸 자신의 죄로 인식했다. 한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은 청소년 범죄의 경우 부모 또한 가해자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어쨌든 미자는 최소한 지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었고, 어떤 영화 평론가의 말대로, 미자의 도덕은 엄마의 도덕(영화 <마더>)을 뛰어 넘는다.
반대의 지점에서 현직 대통령이 떠오른다. 여러 차례 범법 행위로 인해 법의 심판을 받은 당사자가 그에 대해 진솔하게 국민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웃긴 건 숱한 전과가 있는 대통령(그것도 딱히 자랑할 만한 전과도 아닌)이 도리어 국민들에게 ‘준법’을 강조하고 ‘법치’를 강조한다는 사실이다.(물론 그것도 국민을 향해서일 뿐이지, 자기 편에 대해선 대단히 관대하다) 이러한 현실을 그저 아이러니하다며 웃어야 하는가? 최근엔 느닷없이 2년 전 촛불시위와 관련해 사과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며 (누가?) 일갈한다. 촛불시위로 인해 미국과의 재협상으로 30개월령 이상의 소고기 수입이 금지되는 등 조건이 나아지긴 했지만, 일본, 대만과 비교해서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안전한 소고기가 수입되도록 검역 조건이 강화된 건 수많은 국민들의 촛불 때문이었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으며 반성했다는 대통령이 2년이 지나자 시위 당사자들이 사과해야 한다며 말을 바꾼다. 2년 전에 도대체 뭘 반성한 것일까? 이런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건, 지금 대통령이 별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할 수 없는 얘기들이다. (갑자기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다는 한 장관 후보자의 발언이 떠오른다)
이창동 감독이 이런 걸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그다지 관심도 없다. 그저 나는 그렇게 읽고 싶을 뿐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반성이 바로 내가 <시>에서 본 것이다.
※ 당연하게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선 배우의 연기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배우의 연기조차 감독의 연출력에 좌우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평소 ‘연기를 안 하는 연기’를 강조하고, 촬영 현장에서 자신이 만족할만한 연기가 나올 때까지 무수히 많은 테이크를 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윤정희가 주연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과연 잘 될 수 있을까란 걱정이 든 건 바로 이창동 감독의 이런 연출 스타일이 오랜 연기로 고정되어 있을 노배우와 잘 맞을까란 의문 때문이었다. 결과는 말 그대로 판타스틱! 최고의 영화와 연기를 선보인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 님에게 박수를!
※ 덧붙여, 영진위 지원작 심사에서 <시>의 시니라오 점수를 0점을 주어 지원작에서 탈락시킨 영진위가 칸 영화제 현장에 나타나 한국 영화를 지원하겠다며 설레발 치는 모습을 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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