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감동’이란 걸 느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목 깊은 곳이 묵직해 지면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듯, 터질 듯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 이 영화를 보며 내내 울었습니다.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눈물을 쏟았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토록 서럽게 했을까요.
이 슬픔의 기저에는 깊은 연민이 흐르고 있습니다.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영화 속의 미자(윤정희)는 결코 우울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엉뚱한 말을 잘하고 꽃무늬 치마를 입고 머플러와 모자를 잊지 않는 멋쟁이이며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밝고 명랑한 성격입니다. 시를 써 보겠다고 마음먹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도 감동하여 수첩에 감상을 적어보는 소녀 같은 할머니입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거나 돈 벌러 떠난 딸 대신 손자를 맡아 키우고 있다거나 그 손자가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형편이 어려워 중풍으로 누운 남의 집 할아버지를 목욕시키고 돌보는 일 같은, 삶에의 고단함 때문에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그녀의 명랑함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삶의 지저분함과 부딪치는 그 순간 번져나가는 절망감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절망감을 결코 확연히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습니다. 딱 한 장면, 시낭송 모임에 갔다가 혼자 나와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던 장면 말고는 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절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녀에게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너무나...
내가 그토록 슬피 울어야 했던 건 달리 분출되지 않는 그녀의 슬픔 대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가엾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감수성 풍부한 멋쟁이 할머니이니까요.
그녀는 결국 손자 때문에 자살한 한 여학생을 위한 시를 완성합니다. 절망을 표출하는 방법이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녀의 절망은, 절망마저도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를 다시 보러가야겠습니다. 그때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눈물은 보이지 않으렵니다(하지만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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