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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s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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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오후 2:4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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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은 해발 1300m 스위스 알프스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Le Grande Chartreuse)의 일상을 담은 영상으로 2005년도에 제작되었지만, 4년이 지난 2009년도에 비로소 국내에서 개봉되어 우리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세계의 각종 영화제에서 명성을 날린 작품을 뒤늦게나마 볼 수 있게 된 것은 한국 사회(혹은 성도들)의 영성이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워낭소리’, ‘똥파리’, ‘반두비’ 등과 같은 독립영화에 대해 보여준 높은 관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동안 우리 안에 일어난 변화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개봉 자체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에 대한 생각의 변화이고, 무거운 주제를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의 변화이며, 중심이 아닌 주변에 관심을 기울일 줄 알게 된 분별력의 변화이다. 간단히 말해서 영성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작품은 비록 장르상 다큐멘터리로 분류되고 있지만 단지 기록물만으로 볼 경우에는 1688년에 처음 세워진 이래로 1960년 기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에 줄곧 폐쇄되어 온 그야말로 베일에 감춰진 신비의 수도원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 충족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것 역시 적지 않은 의미일 수 있지만, 만일 제작 의도를 누구도 방문하지 못하는 곳을 영화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데에서만 찾는다면, 영화의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화는 그만큼 보는 자로 하여금 단순한 이해나 공감의 수준을 넘어 영화 자체에 몰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수도원에 대한 기록물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도원 자체에 대한 정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일상 가운데 몇 개의 장면들에 국한되어 있고, 또 영화는 외부에 가려져 있는 모습들을 많이 드러내 주고 있지 않다. 물론 촬영 조건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위대한 침묵’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관심을 끄는 영화다.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던 필립 그뢰닝 감독이 방향을 바꿔 입학한 뮌헨 영화 학교를 마치는 시기에 기획했던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러나 1984년에 수도원에 제작의도를 알렸을 때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Die Zeit ist noch nicht rief.)는 수도원 측의 대답으로 인해 15년이나 지난 1999년에 시작할 수 있었던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게다가 음악이나 인공조명도 허용되지 않았고, 5개월간 수도원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촬영하는 동안 극히 제한된 촬영 조건 속에서 감독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 완성된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위대한 침묵’은 다큐멘터리일 뿐만 아니라, 한편의 사실주의 영화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뢰닝 감독이 대사가 거의 없는 162분을 영화 상영시간으로 설정한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도원의 실제를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영화와 현실에서 거의 구별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에 숨 쉬는 소리, 핸드폰 진동 소리, 바스락 거리는 소리 등 보통의 영화관에서는 잘 들을 수 없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제작 과정의 에피소드를 접하면서 필자는 몇 가지 질문을 갖게 되었고 영화를 통해 그 대답을 찾고 싶었다. 그뢰닝 감독의 기획 의도를 듣고 승인하게 될 때까지 15년간의 오랜 침묵 속에서 수도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뢰닝 감독은 과연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던 수도원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수도원의 일상을 담아내는 것 이외에 그뢰닝이 영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객들이 수도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뢰닝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것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위대한 침묵”이 단순히 기록물만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위대한 침묵’의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영화 일반의 의미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살펴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란 보이지 않는 현실을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며, 익숙해진 현실, 혹은 그동안 간과되었던 현실을 일정한 주제의식 속에서 재구성해서 다감각적 이미지로 다시 경험하게 하거나 새롭게 경험하게 하려는 시도에 따라 생산된 영상물이다. 동일한 현실이라도 감독이 어떤 주제로 또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재구성과 해석의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면서 불가피하게 의미의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에 영화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그리고 공간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메시지로 파생된다. 따라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를 하나의 매개로 삼고 성찰한다는 것이며, 또한 의미를 탐색하고 공유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소통하는 것이다. 첫 번째 맥락에서 볼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위대한 침묵’은 일상에서 벗어난 세계를 성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특히 그곳에서 지배적인 침묵이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찰하도록 하는데, 다시 말해서 소리들이 멈추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경험하게 해준다. 그뢰닝 감독은 소리가 멈추었을 때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며, 고요함이 지배하고, 또한 만물의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영상을 통해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면서 매우 잘 찍은 사진 작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결코 이유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뢰닝 감독은 깊이 숨겨진 수도원의 일상을 매개로 ‘침묵’의 의미를 성찰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맥락에서 볼 때, 그뢰닝 감독이 수도원의 일상, 곧 침묵에 대한 성찰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영화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가? 그뢰닝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시간에 대한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위대한 침묵’은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지에 대한 영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영화 속에 일상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과정에서 경험되는 계절의 변화를 표현했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사람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경험의 개별성일 것이다. 아마도 수도원의 일상이 계속되는 한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사람에 따라 경험되는 것은 달라지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그것은 바로 고요함이다.
영화의 바른 이해를 위해 먼저 용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침묵’이라고 번역된 Stille는 사실 ‘고요함’을 의미한다. Stille가 말없음의 상태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말없음의 상태인 침묵과 동일하지는 않다. 아마도 영어 번역이 silence로 번역되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노랫말에서 ‘고요한 밤’은 ‘stille Nacht’의 번역이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전치사 in과 더불어 사용되면서 Stille가 간혹 말없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침묵’으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에 대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의 대화도 있고, 홀로 성경 혹은 책을 소리 내며 읽기도 하고, 성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 정도면 비록 ‘침묵’으로 번역되었다 해도 말없음을 의미하는 ‘침묵’보다는 오히려 ‘고요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침묵’은 단지 인간의 말없음만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고요함은 위기에 처한 엘리야가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기다릴 때 두 차례에 걸친 크고 강한 바람과 땅을 뒤흔드는 한 차례 지진이 그친 후에 찾아오는 순간이다. 고요함은 비록 말은 없지는 않다 해도 전체적인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만물의 평화를 의미한다.
고대 영성의 하나인 침묵은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로 이해되어 오기도 했다. 먹이 앞에서 호시탐탐 노리며 소리를 죽이는 동물의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압도된 상태, 바로 그것이 말없음, 곧 침묵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침묵’은 결코 침묵의 영화가 아니다. 그뢰닝은 하나님에 의해 압도된 의미의 침묵을 성찰하면서 침묵으로부터 무엇이 경험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침묵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소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도 어떻게 평화로운지에 집중한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 속에서 각종 소리들을 담아내었다. 바람 소리, 빗물 소리, 은은한 종소리, 회랑을 걸어가는 수도사의 가벼운 발소리, 마룻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 연필 지나가는 소리, 금속성의 가위질 소리, 둘씩 짝 지어 산책을 나설 때마다 들리는 대화 등. 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 가득한 것은 고요함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말만 없을 뿐, 갈등과 반목,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그뢰닝 감독은 수도사들의 대화 장면을 보여주면서도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고가는지를 전해주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소리가 있고 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요함이 있다는 것이며, 만물의 평화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 보고자 했고, 무엇이 들리는지 듣고자 했으며, 또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이며 간과하며 살았던 것들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고요함은 사람 의지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나타난다. 엘리야가 고요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고요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진 곳이며,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서 볼 때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원이다. 영화를 보고 수도원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할 가능성은 없지 않다 하더라도, 감독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소리를 멈추었을 때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침묵을 통해 형성되는 고요함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듣게 된다.
이것을 노자의 도덕경 16장의 내용과 비교해보라. “완전히 텅 비우고, 오로지 고요함(靜, Stille) 만을 지키고 있으니, 온갖 만물은 함께 아우러져서 변화하는데, 나는 이것들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보고 있네. 하늘의 도리는 돌고 돌면서 만물은 각자 그 근원(Wurzel)으로 되돌아 오는구나. 근원으로 되돌아 온 것을 고요함(靜, Stille)이라 하며, 이를 일러 하늘의 뜻(命, Schicksal)이 회복된 것이라고 말하네. 하늘의 뜻이 회복된 것을 일러 늘 변함없는 평상심(常, Ewigkeit)이라 하고, 늘 변함없는 평상심을 깨닫는 것을 밝은 지혜(明, Klarheit)라고 말하네. 평상심을 모르면 허망하게 재앙만을 일으키게 되고, 평상심을 알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포용성을 지니게 되며(duldsam), 포용성을 지니는 것이 곧 사사로움이 없는 공평한 보편적 존재(Gerechtigkeit)이네. 보편적 존재야 말로 천하의 왕(Herrschaft)이며, 천하의 왕은 곧 하늘이네. 하늘이 곧 도(道, SINN)이며, 도(道, SINN)는 영구불변하네. 육신은 죽어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참나(道)에게는 아무런 위태로움도 없네.”
노자의 도덕경 16장은 영화의 내용을 너무나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통해 드러나는 고요함 속에서 만물은 근원으로 회귀하며, 우리는 완전한 고요함 속에서 회복된 하늘의 뜻을 만나게 될 것이다.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더욱 귀 기울이게 하며, 고요함은 세상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이런 의미의 결론을 그뢰닝 감독은 한 시각 장애인 수도사의 말로 대신하는데, 비록 인터뷰 때문에 그의 침묵 서원은 깨졌지만, 듣는 우리에게는 거듭 반추할수록 영화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해준 이유는 다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를 통해 세상에 보여주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나는 행복하다”, “요즘 사람들의 삶이 불행한 이유는 하나님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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