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손길이 느껴진다...★★★☆
Ghost Writer, 유명인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직업,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대필작가’ 쯤 되겠다. <유령작가>는 미국 또는 미국과 범죄인인도협약을 맺은 국가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탁월한 정치 스릴러 영화다.
영국의 전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쓰던 작가가 사고로 죽은 이후 새로운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 전임자가 써 놓은 원고를 다듬던 그는 전임자의 죽음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죽음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한편 재임 시절 CIA에게 테러리스트를 불법적으로 인도했다는 언론보도가 터지며 아담 랭은 궁지에 몰리고, 새로운 유령작가는 이 사건과 전임 유령작가의 죽음이 연결되어있다는 의혹을 품고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유령작가>는 사용하는 음악이라든가 연출에서 히치콕 감독의 그림자가 느껴질 정도로 전통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다. 어쩌면 이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요즘 누가 이렇듯 느리면서도 무미건조하고 스산한, 별다른 특수효과 하나 사용하지 않는 스릴러 영화를 내 놓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유령작가가 자서전을 쓰기 위해 들어간 섬의 풍경이 바로 이 영화의 정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장면을 보자. 유령작가가 CIA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폴 에멧 교수(톰 윌킨슨)를 방문하고 집을 나선 직후 한 차량으로부터 추적을 당한다. 화면은 두 대의 차량이 쫓고 쫓기는 과정과 아슬아슬하게 섬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영화라면 온갖 현란한 기술과 스피드가 활용되었음직한 이 차량 추격전이 <유령작가>에선 그런 것 하나 없이 화면의 편집만으로 보는 관객의 심장 박동수가 증가할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한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진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영화적 특징 말고 이 영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는 점은 <유령작가>가 너무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정치 풍자가 강하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를 잇는 영국 노동당의 장기 집권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최연소 노동당 당수라는 매력적 정치인, 토니 블레어의 존재였다. 영국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을 환호케 한 토니 블레어의 집권은 그러나 집권 이후 그가 보여준 여러 행태들로 인해 좌절로 변하게 된다. 대처의 정책을 빼다 박은 듯한 국내 정책들도 그렇지만, 특히 대외 정책에서는 ‘부시의 푸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자 정책은 거의 부재했다. (오죽 했으면 <러브 액츄얼리>에서 미국 대통령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영국 총리를 그려놨겠는가)
<유령작가>의 아담 랭 전 총리는 이미지부터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블레어 전 총리를 연상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블레어 총리는 미국이 하자고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일까? 수만의 런던 시민들이 반전 시위에 나선 가운데 영국은 미국을 제외하고 이라크에 최대 규모의 군인을 참전시킨 국가였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미국의 꼬봉 역할을 충실히 했다. ‘혹시 블레어와 미국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불순한 의심을 폴란스키는 영화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미국의 국무장관을 굳이 콘돌리자 라이스를 연상시키는 흑인 여성을 캐스팅한 것은 폴란스키 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아담 랭 전 총리의 비서진들을 포함한 많은 출연진이 그저 소모적 역할로 활용된 건 매우 아쉬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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