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괴로울지라도 삶은 계속된다....★★★☆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확실히 영화의 감상평이나 리뷰는 영화를 보고 나서 2~3일 내에 생각을 정리해서 올리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시리어스맨>은 극장에서 본지 몇 개월이 지난 영화이다. <시리어스맨> 말고도 <인 디 에어> <공기인형>이 비슷한 시기에 보고는 아직 리뷰를 작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영화를 관람했던 당시에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시간적 문제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 문제였긴 했지만. 아무튼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영화라면 굳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세 편 다 꽤나 인상적인 영화였다. 따라서 이 세 편의 리뷰는 디테일한 측면보다는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시리어스맨>의 처음은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애매한 짧은 이야기가 도입부를 장식하는 데, 분위기가 대단히 기묘하다. 시대도 지역도 짐작하기 어려운 오래된 유대인 마을의 민가를 한 랍비가 방문하고, 민가의 여인은 랍비를 악령이라며 칼로 찌른다. 그리고 칼에 찔린 랍비는 피를 흘리며 도망친다. 사실 이 장면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겠다. 영화를 봤던 당시엔 뭔가 생각난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잊혀지고 말았다. 다만,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위대한 랍비가 혹시 처음 등장했던 칼에 찔린 랍비가 아닌지 궁금해 했던 기억은 난다. 그러니깐 처음에 등장한 랍비가 진짜 랍비인지, 아니면 여인의 주장대로 악령인지, 아니면 수백 년을 살아남은 신 같은 존재인지 영화는 명확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다.
어쨌거나 <시리어스맨>은 온갖 고난이 한꺼번에 밀려든 대학교의 한 물리학자 래리(마이클 스터버그)와 그 주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래리의 삶을 들여다보자. 어느 날 아내는 자신의 지인과 사랑에 빠져 이혼을 선언하고, 집도 아내에게 뺏긴 채 밖을 전전한다. 딸은 성형수술을 위해 자신의 돈을 훔치고, 아들은 온갖 말썽을 부린다. 같이 지내는 동생은 경찰에게 연행되고, 이웃집 남자는 자신의 땅을 침범해 담을 쌓는다. 대학에선 종신재직권 심사를 놓고 누군가 래리를 겨냥해 학교에 투서를 보내고, 한 한국인 학생은 학점을 좋게 달라며 자신의 주위를 맴맴 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고민하던 래리는 좋다는 랍비들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이 영화를 보며 놀랐던 건, 온갖 장르와 이야기들을 다양한 화법으로 제조해 내는 코엔 형제의 연출력이었다. 최근만 보더라도 그토록 서늘하고 냉정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후, 몸에서 힘을 완전히 뺀 <번 애프터 리딩>이라는 허허실실 작품을 내 놓은 후 비극와 희극이 절묘하게 주조된 <시리어스맨>을 연달아 내 놓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간단한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는 아마 영화 속 주인공이 곤경에 치어 자살한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은 선택일 정도로 기본적으로 비극적 설정을 가져다 쓰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 순간도 쉬지 않을 정도로 수다스러움과 부산하면서도 냉랭한 유머들이 남발하고, 이를 보는 관객도 유머에 따라 다양한 웃음을 흘리게 된다.
‘행운은 혼자서 오고,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했든가?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살다보면 이 말이 떠오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영화 속 주인공의 설정은 과장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나 내 주위를 봐도 대체로 안 좋은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그 당사자를 충분히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삶은 왜 이토록 힘든 시련을 안겨주는가? 래리는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 랍비를 찾아 나선다. (랍비 대신 목사, 신부, 스님 또는 점집 등등을 대입해도 의미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래리는 랍비로부터 해답을 얻었을까? 아니,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이전에 과연 이 질문엔 해답이란 거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랍비들의 얘기는 그저 허공을 맴돌고 그 사이에도 래리에겐 끊임없이 곤경이 닥쳐온다. 영화는 저 멀리 토네이도의 모습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곤경은 장난일지도 모른다. 더 큰 곤경이 토네이도처럼 곧 불어 닥쳐 모든 걸 휩쓸어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 예전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이 그저 공부벌레 내지는 좋게 말하자면 성실, 나쁘게 말하자면 일에 미친 사람들 쯤으로 그려진 데 반해, 최근에 들어오면서 점차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전 세계 어느 국가라도 한 가지 모습으로 박제화된 국가나 민족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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