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일정보다 1년 2년 정도는 늑장?을 부려 공개해도 여전히 세인들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른다. 오히려 증폭될 뿐이다. 추측과 억측이 늘 난무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삽시간에 그러한 흉흉한 소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춘다. 어느 덧 시네아스트의 반열에 오른 왕가위 감독 얘기다. 그의 신작 <2046> 역시 무수한 구설수를 낳으며 5년 만에 공개됐다.
영락없는 왕가위 표 영화다. 강렬한 원색의 탐미적인 이미지들은 여전히 스크린을 부유하며 시공간을 중첩시킨 비선형의 내러티브는 역시나 보는 이의 뇌를 헤집고 다니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앙코르와트 사원에 사랑의 기억을 봉인한 챠우(양조위)의 플레이보이적인 껄떡임까지 유감없이 등장하는 그의 후일담을 풀어놓는 <2046>은 감독의 의도야 어찌됐건 어쩔 수 없이 <화양연화>의 속편으로 해석된다. 오래 전 <화양연화>를 <아비정전>의 뒷 이야기로 말했듯 말이다. 혹은 왕가위의 전작 부분 부분을 소환시켜 모자이크한 작품으로 보인다. 허나, 아쉽게도 기왕의 영화들을 뛰어넘는 일신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 한다. 그러기에 족쇄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지난날의 기억으로부터 헤어나려고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챠우의 과시적이면서도 쿨한 라이프 스타일이 왕가위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지는 건 일견 타당하다.
수리첸(장만옥)과 사랑을 공유했던 2046호에 기거하며 기자와 소설가로 살아가는 챠우는 미래도시에 관한 ‘2046’ 소설을 쓰면서 은연중 그곳에서 세 여인과 만나고 헤어진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 속에는 수리첸과 그녀를 잊지 못해 늘 무언가에 사로 잡혀 있는 챠우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그러니까 그 처자들은 챠우의 혼미한 의식 속에 자리한 그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간직하고 싶은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자 시간을 공간화 시키고, 충만한 긴장감으로 빼곡히 찬 그 아찔한 무드를 지속시켰던 <화양연화>처럼 <2046> 역시 망설이며 서성이는 그네들의 처연함을 잡아채고자 공을 들인다. 하지만 캐릭터의 머리수와 에피소드가 늘어나서 그럴까? 영화는 각각의 조각들이 흩어져 분산된 느낌이다. 왕가위의 말마따나 두 연인의 사랑 과정이 아닌 사랑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싶었기에 마침표 없는 여러 유형의 남녀 관계를 보여줬다 치자. 하지만 그것을 관통하고 닭 꼬치처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그 절제된 내밀함이 영화에는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영화는 강박적으로 현재와 머나먼 미래의 시간을 넘나들며 인물을 교차시키고 너무도 많은 것을 과잉되게 전시한다. 이야기는 반복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지루함의 순간이 곳곳에서 목도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불편함 속에서 매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또 왕가위의 장기 아니겠는가? 우짤 수 없이 가슴이 미어지며 무너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더 애절하고 애틋함을 느끼게끔 하는 데 있어 왕가위 영화에 절대적 요소로 자리하고 있는 음악이 크게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저 멀리 뒤편으로 흘러 간 기억의 끈을 놓지 못하고 망설이며 흔들리는 통한에 찬 인물들을 모호한 장소에 붙잡아 둔 채 황홀한 이미지와 맴도는 이야기로 그들을 이끌며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2046>은 분명 지루한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보이는 것 이상의 아련한 그 무엇을 어른거리게 하는 왕가위의 감각적이면서도 섬세한 스타일이 여전히 자리한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