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 재미와 반전을 위해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얽힌 단서들. 하지만 때론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것이 더 극적 재미와 반전으로 다가온다.
"라자루스 신드롬"
사후를 본 사람에 대한 뉴스나 증언에 우리들이 귀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모두 경험하게 되는 결말이지만 죽기전엔 알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했다 살아난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묘사로 간접 경험을 해 보지만 또 다른 궁금증만을 낳을 뿐 사후에 일어나는 현상이나 세상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 <애프터 라이프>는 '라자루스 신드롬'을 통해 사후와 관련된 현상을 소재로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의 부활'을 본따 명명한 라자루스 신드롬은 사망선고가 내려진 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며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되는 현상이다. 사망 선고가 내려진 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영혼이 떠돌면서 우리 곁에 머무는 3일이라는 상황은 사후만큼이나 궁금하다. 영화에서처럼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가 죽어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라자루스 신드롬처럼 내 자신이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3일동안 방황과 혼란에 헤매다가 진정한 죽음의 세계에 빠져들어가는 것일까... 비록 영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현상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섬뜩하고 놀랍기만하다.
"식스 센스와 같은 전율의 기대"
처음 <애프터 라이프>의 예고편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식스 센스>였다. 자신이 죽은 사실을 모른채 소년의 정신치료를 돕던 브루스 윌리스. 그러나 결국 영화 초반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의 총에 죽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던 순간의 반전은 섬뜩함과 짜릿한 공포를 선사했고 지금까지 최고의 반전 영화로 꼽히고 있다. <애프터 라이프>도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애나 (크리스티나 리치)와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장의사 앨리엇 (리암 니슨)의 설정은 여러모로 <식스 센스>와 유사하다.
자신이 죽은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영화를 전개한 뒤 그 사실을 밝힘으로 최고의 반전을 선사한 것이 <식스 센스>라면 <애프터 라이프>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애나와 죽은자를 볼 수 있다는 엘리엇과의 대립된 인물 구도를 미리 밝힌 뒤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한다. 살아있을 때처럼 말하고 움직이며 심지어 입김까지 생기는 것은 사망신고 후 그녀가 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죽은이들의 공통점일 뿐 죽음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며 죽은자들에게 죽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상황은 진정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알 수 없도록 하며 결말을 쉽게 예상하지 못하게 한다.
"죽은 것인가 죽인것인가?"
<애프터 라이프>는 이 물음에 대해 보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다. 애나의 행동이나 말 그리고 입김은 분명 죽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엇이 입김을 몰래 지우거나 '하이드로 브로닌'이라는 신체의 모든 감각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약품을 사용하는 부분은 그녀가 사망 후 살아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 애인인 폴에게 전화를 하고 경찰의 방문에 불안해 하거나 열쇠를 두고 온 것을 알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앨리엇의 모습등은 살아있음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고 마지막 폴에게 하는 행위를 봐서도 장의사가 모두를 진짜로 죽이려는 잔혹한 의도가 있음을 비추기도 한다.
그에 반해 애초 그녀가 코피를 흘리고 불안한 정신 세계로 고통받는 모습은 비참한 결말을 암시했고 영안실의 할머니 혼령과 대화하거나 자신의 어릴적 모습을 만나는 장면등은 분명 그녀가 죽은 것임을 의미한다. 폴의 경우도 사고가 생기는 장면이나 그가 그녀의 무덤에서 만나는 장면등은 분명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애프터 라이프>는 각각의 장면들을 단서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죽은 것인가 아니면 죽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보게 만든다.
"충격적인 소재와 기대감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에도 떨어지는 긴장감"
'사망신고가 내려졌지만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것인가?'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영화로 한 만큼 '내가 저런 상황에 놓인다면'이란 섬뜩한 물음도 하게 되고 진실은 무엇인가를 무수한 단서를 가지고 추리해가는 재미도 있다. 애나를 연기한 크리스티나 리치는 별다른 분장이 필요없을 정도로 섬뜩한 전율을 주기에 캐스팅은 적절해 보인다. 블랙과 화이트로 이분되는 영상 속 색체에 그녀의 붉은 의상이나 붉게 염색한 머리 색은 공포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나친 혼돈은 영화 자체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의구심도 갖게 한다.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르게 만들수는 있겠지만 때론 분명하지만 숨겨진 결말을 향해 진행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부러 의도된 함정을 만들어 잘못된 결말에 가게 해도 좋다. 눈에 보이는 단서를 흩어두고 그걸 물어 헛다리를 짚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면에 깔린 진짜로 의도한 결말이 분명하다면... <애프터 라이프>가 <식스 센스>와 같은 재미와 전율을 주지 못하는 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용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앨리엇이 애나에게 묻는 질문이다. 삶에 미련을 둘 정도로 가치있는 삶이 아니었음에도 왜 그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살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의미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 애나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인정하고 만다. 앨리엇은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잭에게 "삶의 의미가 없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살려는 우리들의 공기를 뺏기 때문에 땅에 묻는다"고 말한다. 그는 살아있음에 고마워하지 않고 생을 낭비하는 사람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영향을 받는 것을 죄악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물에 대해 스스로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의 가치를 높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하루를 살기 위해 보내는 시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이 대사 하나로 커다란 공포나 전율을 줄지 모른다. 살아있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죽음보다 값진 삶을 영위하자. 애나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헛되이 보낸 삶으로 우리가 죽음을 받아 들일 수 없어서는 안될테니까...
"애필로그"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아내려는 두뇌 플레이와 충격적인 라자루스 현상을 알게 된 점이 이 영화에 장점이라면 지나친 기대감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말의 아쉬움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강한 임팩트가 없는 시종 무난한 진행도 긴장감을 갖지 못하는 요소이다. 그래도 너무 큰 기대만 아니면 미스테리한 전개와 여러가지 해석이 난무할 결말에 자신의 해석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라면 볼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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