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보는 내내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영화[이클립스] 이후 오랜만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체험을 했다.
동물을 매개로, 한 인간이 역경을 딛고 성장한다는 감동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이 영화, 번지수가 살짜쿵 다르다 하겠다.
주인공(서주희-'김태희' 분)이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건 맞는데 그 결정적인 동기부여의 일등공신은 말(馬)이 아니라 남자(우석-'양동근' 분)더라는 이야기다.
1. [마음이], [마음이2], [각설탕] 이 셋의 공통점은 동물영화라는 것. 그리고 흥행성적이 저조했다는 것. 그렇다. 한국엔 동물영화의 성공적인 사례가 없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랑프리]는 예의 [각설탕]을 기획하고 제작했던 이정학 PD의 절치부심으로 기획된 후속작이다. [각설탕]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욕심이 지나쳐서였을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되려 무리수로 돌아온다.
우선 앞에서 지적했듯 이 영화는 멜로영화에 가깝다고 해야 할만큼 주희와 우석의 애정라인이 골자다.
경기도중 불의의 사고로 인해 그토록 원하던 그랑프리의 꿈을 스스로 접은 주희가 선택하는 새로운 삶의 방향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말을 타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이런 주희의 선택은 비약으로 보인다. 여성 최초로 그랑프리 우승자가 되겠다던 배포의 소유자였던 그녀가 은퇴선언 이후 대뜸 남자에게 기대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건 진심의 여부를 떠나 납득하기 쉬운 전개는 아니다. 이런 부자연스런 주희의 태도는 이후 우석과의 만남에 대한 복선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복선은 말 그대로 숨겨놓는 것이 미덕이다.
△ 낙마사고로 자신의 말 '푸름이'를 잃고 좌절하게 되는 주희.
이 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적으로 하나의 예정된 결말을 향해 꿰어 맞춘 듯한 우연의 발생이 잦게 느껴진다. 박근형과 고두심(극중 이름 미상)의 애증관계로 인해 갑작스레 중반까지 이어지던 닭살스럽기까지 한 애정전선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아마도 인물간의 관계가 헐겁게 설명되면서, 팝업되는 갈등들이 그 설명력 자체를 잃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선택'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 대한 설명이 미진하다.
△ 멜로영화 였다면 탁월했을 연출이 몇 씬 등장한다. 이 둘이 연인으로 발전하는 포장마차씬이 그 중 하나.
2.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고전(古典)이지만 언제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주희의 성취에는 그런 희열이 없다. 그녀가 일어섰던 동력이 그녀 자신이 아니라 우석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위해 달리라는 우석의 말이 무색하게도 주희가 그랑프리를 거머쥐려고 하는 이유조차 우석을 되찾기 위함으로 보일 정도다.
△ 주희는 우석의 꿈을 찾아주기 위해 우석의 엄마에게 그랑프리 타이틀을 놓고 '내기'를 제안한다.
'Power of love'라는 메시지를 덮어놓고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진정 보여줄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다.
다시 동물영화로 돌아오자. 동물영화가 단순히 동물이 연기를 한다는 신기함에 그친다면 관객은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동물영화에서 동물이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닌 진짜 주인공이 되고 동물과 인물간의 교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어야 관객의 마음도 같이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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