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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태양 태풍태양
sunjjangill 2010-10-02 오후 2:43:39 945   [0]

한때 청소년의 해방구는 겨울이 되어서야 그것도 매서운 추위의 빙판 위에서 열리곤 했다. 황량한 벌판 같은 스케이트장에서 소년과 소녀들은 비로소 경계를 허물고 몸으로 부대끼곤 했다. 그건 무척 제한된 것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트는 앞으로 질주하기에만 적합해서 서로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다. 멋을 부려봐야 무섭게 가속도를 내거나 과격한 동작으로 멈춰서는 것뿐이다. 스피드 스케이트를 잡아먹은 건 롤러스케이트다. 무엇보다 계절의 제약이 사라졌고, 팝송이 꽝꽝 울리는 실내에서 소년 소녀들은 바퀴 달린 피겨스케이트로 달리고 멈추기를 자유롭게 하며 좀더 가까워졌다. 그 다음 세대의 인라인 스케이트, 그중에서도 어그레시브 인라인은 말하자면 스피드 스케이트와 롤러스케이트의 행복한 결혼이다. 스피드와 화려한 몸동작을 동시에 가능케 하고 공간의 제약을 허물어뜨렸다. 도로, 공원은 물론이고 계단과 난간, 빌딩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

스케이트의 공간은 그렇게 확장돼왔고 그만큼 스케이트를 착용한 몸의 관계도 확장돼왔다. 그러나 스케이트의 각기 다른 시대를 관통하는 건 여전히 하나다. 스케이트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세계에 머물던 시절을 상징한다. 잘하지 않을 용기도, 결정하지 않을 용기도 가능한 시기. 그렇게 빛나는 한 시절을 미끄러지듯 달리며 스피드로 바꿔주는 것이 스케이트다.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은 그 끝무렵에서 출발한다. 자, 빛나는 한 시절이 저물고 있다, 이제 그 스케이트를 타고 어디로 갈래, 아니 그 스케이트로 무엇을 할래, 라고. 이건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막 스물살이 된 소녀들에게 던졌던 물음이기도 하다. 다만 그때는 속도를 낼 수 없는 휴대폰과 길 잃은 고양이로 묻고 답했다. 남자소년 버전의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들에게 스케이트를 신겼으므로 스피드와 몸의 향연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파티가 필요하다. 영화 자체가 스타일리시해질 수밖에 없고, 속도감으로 격렬히 흔들릴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스피드 안에 대화를 숨겨야 하므로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세심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여지는 줄어들고 만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매개로 하는 성장영화의 노선을 택한 순간, 스포츠와 소년을 이어주는 장르의 관습에 자신의 일부분을 내줘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태풍태양>은 <고양이를 부탁해>에 비해 감히 섹스를 이야기하고 더 적극적인 코뮌을 시도한다.

교실 안에 갇혀 졸고 있는 소요(천정명)의 몸이 꿈틀댄다.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에 막 매혹된 초보다. 소요의 앞에 나타나 성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모기(김강우)와 갑바(이천희)는 그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소요의 소요(逍遙)가 모기와 갑바로 상징되는 두 갈래 길의 충돌과 갈등에서 시작되고 끝맺으며 나아가 희망을 얻어내는 건 이 영화의 장르적 성격에 비추어 당연한 수순이다. 일단, 스케이트 코뮌을 형성한다. 소요의 부모는 일찌감치 외국으로 쫓겨나고 그의 아파트에 모기와 갑바의 청춘 군단이 군거를 이룬다. 아무렇게나 먹고 자며 스케이트에 관한 진실을 주고받는다. 늘 그렇듯 코뮌은 오래 가지 못한다. 갈등은 헬멧에서 시작된다. 안전하게 꾸며진 익스트림 파크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갑바는 헬멧을 쓰지 않는 자기 멤버들의 본을 아이들이 따라하는 것에 화를 낸다. 모기가 한마디 한다. “난, 내가 알아서 다쳐.” 사실 갑바는 타협을 시작한 거다. 어렸을 때부터 해야 (넘어지고 다치면서) 자기 몸에 대한 감각을 잘 키울 수 있다고 어른을 설득하던 그가 아닌가. 모기와의 대립각은 좀더 분명해진다. 갑바는 후배들에게 미래를 약속해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대회를 거쳐 세계대회 진출을 계획한다. 여비를 마련하려고 어그레시브를 활용한 광고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데 그건 화가 화를, 욕망이 욕망을 부르는 재앙의 순환고리에 걸려드는 일이었다.

모기는 감각의 무정부주의자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걸로 끝내고자 한다. 그는 그들 중에서 최고의 솜씨를 지녔지만 ‘프로페셔널’로 꾸며진 게임의 규칙, 즉 돈과 명예의 시스템 안에 포섭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한주(조이진)는 그런 그를 야망이 없어서 좋다고 하지만 팀을 ‘구원’하기 위한 이벤트조차 거부하는 그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모기는 작은 돈을 위한 이벤트조차 족쇄로 돌아올 거라는 걸 확신하는 근본주의자다. 그렇다면 모기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가 가장 슬픈 대목인데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다. 모기가 스케이트를 유실물 센터에 맡기고 도시 속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로 사라져버리는 건 유일무이한 선택처럼 보인다(여기서 혹시 당신이 자살충동을 느낀다면 ‘빛나던 한 시절’을 영화로도 지속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제 장르적 결말이 남았다. 끊긴 고가 위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난감해하던 소요는 용케도 모기와 갑바의 두 가지 길을 절충하는 법을 깨달았다. 영화는 그런 소요의 모습을 보여주나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소요의 길이 진정한 희망의 발견인지 아니면 변절인지 판단할 수 없다. <태풍태양>이 남기는 또 하나의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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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태양(2005)
제작사 : 필름매니아 / 배급사 : 쇼이스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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