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물이 파도처럼 밀려들던 조선 말기 혼돈의 때에 외딴섬 위로 한맺힌 원혼의 저주가 서리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그 혼의 주인은 7년 전 죽은 강승률(천호진)이란 객주다. 건강한 닥나무가 많고 물과 볕이 좋은 이 섬에 제지소를 세워 사적인 부와 공적인 덕을 함께 쌓아갔던 그는, 천주교인 황사영에게 재정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몰살당했다. 섬의 토포사(조선시대 도적잡는 일을 맡았던 관리)는 다섯명의 가족을 5일간 다른 방법으로 사형에 처했다. 어린 아들은 죽창에 꽂아, 딸은 끓는 물에 담가, 아내는 얼굴에 종이를 발라, 노모는 벽에 머리를 깨어, 강 객주는 사지를 찢어 죽였다. 그리고 7년 뒤, 임금에게 바칠 공물을 실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이원규(차승원)와 최 차사(최종원) 일행은 도착 첫날, 장학수란 사람이 죽창에 꽂힌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방화와 무관해 보인 이 사건을 이원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하고 독기(유해진)란 선원을 범인으로 지목해 가둔다. 그러나 이튿날 장씨 성을 가진 호방(승정원의 관리)이 삶아져 죽은 시신이 돼 나오고, 셋쨋날 강 객주 일가의 이야기를 들려준 독기가 얼굴에 종이가 발라진 채 질식해 죽는다. 장학수, 장 호방, 독기는 모두 강 객주를 천주쟁이라 발고한 무리였다. 발고자는 모두 다섯. 강 객주가 죽은 뒤 제지소 운영을 이어온 양반 김치성과 그의 아들 김인권(박용우)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강 객주의 원혼이 한 짓이라 말하고, 이원규는 나머지 발고자 두명과 함께 살인범을 찾아 나선다.
초반부터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혈의 누>는 많은 층의 미스터리 구조를 잘 짜올린 추리물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 앨러리 퀸 등의 추리소설에 매료된 사람들은 쉽게 외면하기 힘들 영화다. 작고 외딴 공간에서 벌어지는 살인, 7년 전의 죽음과 연관된 원한, 연유와 범인을 알 수 없는 화재사건, 화재 직전에 사라진 선원, (첫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어떤 여인의 죽음. 크고 작게 던져지는 단서와 설정들은 하나의 커다란 그물망 안에서 정확하게 인과관계를 맺고 있고, 그 매듭들이 드러날수록 사건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도 커진다. 강 객주의 억울한 죽음을 묵인했던 섬 사람들은 원혼의 진노를 두려워하지만, 원혼은 구천을 떠돌 뿐이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복수를 작정한 인간이다.
그러나 <혈의 누>는 (굳이 만들어서 예를 들자면) ‘어떤 수를 곱해도 끝자리에 3이 남는 수는?’류의 재치있는 수학문제처럼 관객에게 지능만을 요구하는 미스터리는 아니다. 제지소 관리 조달령은 공물 궤짝을 실수로 물에 빠뜨린 선원의 뺨을 후려치며 “네놈들 목숨보다 귀한 지물이야”라고 말하고, 김치성 영감은 이원규에게 “반상의 질서가 엄연한데 종놈들과 겸상을 하고 천한 백정 놈에게 장부를 맡겨 그 질서를 어지럽히니 그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이냐?”라고 언성을 높인다. 섬의 무당 만신(최지나)이 굿을 벌이는 모습은 드러나지 않은 동요와 불안을 잠재우려는 것임에 분명하고, 이원규와 김인권은 민심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각자의 신념으로 충돌한다. 사건은 실루엣이다. 그 속은 전근대와 근대가 맞물린 시대의 위태로움과 그것이 부추긴 인간의 여러 본성들로 꾸역꾸역 채워져 있다. 결국은 누군가의 사랑이, 누군가의 이기심이, 누군가의 탐욕이, 누군가의 두려움이, 누군가의 비겁함이 이 피비린내나는 일에 공모한 것이고 그것들이 곧 <혈의 누>의 육체다.
마지막 살인이 예정된 밤의 공포가 섬을 옥죄어올 때, 만신은 진혼굿을 벌일 채비를 한다. 그녀는 이원규에게 말한다. “그른 것을 바로 잡아 억울한 이가 없게 하는 것이 나으리께서 하실 일이라면, 죽은 이의 극락 천도를 기원하고 산 자를 위로하는 것 또한 저의 일일 뿐입니다.” 아름다운 절벽과 해안과 숲을 가졌음에도, 섬은 환한 햇살을 받아 빛난 적이 없다. 피냄새가 짙어질수록 물맛이 비려지니 물고기들은 떼죽음을 당해 사방에 썩은 내를 풍긴다. 맑은 물을 마시지 못한 어린 것들은 앓아눕는다. 문설주마다 부적이 붙고 생닭의 피가 발린다. 영화는 원혼의 진노가 부른 민심의 동요와 그것을 막을 수 없는 수사관의 무기력감을 넓게 판다.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과 진실이 폭로되기 직전의 긴장감도 폭발한다. 전작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교차함으로써 판타지 같은 멜로에 필연성을 심었던 김대승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플래시백과 교차편집을 주요한 장치로 활용한다. 사람과 사건, 감정과 사실이 충돌할 때의 진동이 국부적이지 않고 거대한 흔들림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런 치밀한 구조 때문일 것이다.
<혈의 누>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폼나는 구석을 갖고 있다. 핏빛을 조롱하듯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살인범의 이미지는 강렬하고, 말을 타고 고속으로 질주하는 숲속의 추격신은 두드러지게 멋있으며, 시대극이 요하는 엄격한 말씨는 뜻밖의 품격을 만들어내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의 테마를 빌려온 음악은 장중하며 로맨틱하다. 피가 비되어 뿌려지는 마지막 장면은 조금 부담스럽고 과욕으로도 느껴지지만, <혈의 누>는 눈에 힘을 줘서 카리스마를 뿜어보려는 장르영화가 아니다. 비겁하고 어리석고 나약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인간의 본성을 들추어내려는 드라마다. 한편에서 아버지가 칼과 법으로 징계하고, 다른 한편에서 어머니가 기도와 손길로 달래도 다스려지지 않는 본성. 그것은 섬뜩하다기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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