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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국경의 남쪽
sunjjangill 2010-10-07 오후 9:36:30 968   [0]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한동안 그 여자만을 떠올리지만, 서서히 남쪽 생활에 젖어들면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북한에서 사랑했던 그 여자가 남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귀에 익은 이 이야기의 배경은 3·8선 획정 때일 수도, 한국전쟁 당시 ‘바람찬 흥남부두’일 수도 있다. 분단이라는 상황이 낳은 이 의도치 않은 삼각관계는, 하지만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국경의 남쪽>은 시간차로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자’ 남녀를 통해 이같은 관계를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준다.

관현악단 호른 연주자 김선호(차승원)는 평양의 평범한 중산층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했다고 ‘기록’된 할아버지 덕에 남부럽지 않은 형편을 누리고 있으며, 부모님과 누이 부부와도 그럭저럭 화목하게 살고 있는데다 “성격도 얼굴도 동치미처럼 쩡하고 시원”한 여성 연화(조이진)와 목하 열애 중이니, 별일이 없는 한 그의 인생은 거침이 없을 듯 보인다. 하지만 별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어느 날 온 가족을 소집한 아버지가 ‘할아버지는 실제로는 남한에 살아 있으며 그동안 서신을 교류해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서신교류가 당국에 적발된 탓에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처하게 됐다. 결국 이들 가족은 탈북을 결행하게 되고, 선호는 ‘사람을 보내서 남으로 부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연화 곁을 떠난다.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남한에 도착한 선호가 연화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또 다른 여인 경주(심혜진)를 만난 뒤에야 시작된다. 북한쪽 소식통으로부터 연화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호는 그의 상처와 삶을 보듬어주는 경주와 함께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그 삶에 익숙해질 즈음, 연화는 탈북자 수백명과 함께 남한에 나타난다. 선호는 연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하지만, 서서히 옛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초라한 자신을 온몸으로 받아준 현재의 여인 경주를 저버릴 수도 없다.

<국경의 남쪽>은 인민들이 탈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드라마도,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고단한 삶을 드러내는 사회드라마도 아니다. 때때로 사회성과 정치성의 민감한 바늘숲을 그냥 지나치는 영리함을 발휘하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엇갈리는 사랑의 슬픔이다. 신파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신파성’을 숨기지 않은 채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그런데도 영화 속 사랑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가식이 아니라 진실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이들 모두가 변방의 존재이기 때문일 것. 남한에서 이들이 발붙일 곳은 거의 없다. 북녘을 떠나면서 ‘공화국’을 배신한 이들에게 배신은 이제 운명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들은 한때 존경했던 지도자 동지의 이름을 명찰에 달고 행인의 옷깃을 붙든 채 호객행위를 해야 한다. 아웃사이더의 마음은 아웃사이더만이 헤아려줄 수 있다. 연화가 분식점에서 ‘랭면’을 주문했을 때 종업원이 “혹시 연변에서 왔수까?”라고 묻는 것처럼. 남한에서 살아왔지만 경주 또한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가진 여자다. 그의 과거는 영화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선호를 성심성의껏 도와줄 때나 가게를 찾아온 연화에게 냉면을 대접하려 할 때 연화의 내면은 짐작된다. 이 경계인들은 사랑 말고는 별달리 가질 수 있는 게 없는 존재들이기에 어긋난 사랑의 교집합은 더욱 애처롭게 다가온다.

<국경의 남쪽>이 신파를 극복하는 또 다른 지점은 연화라는 캐릭터의 존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통쾌한 처녀” 연화는 직설적이며 씩씩한 인물이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게 될 때나 결혼 이야기를 할 때 관계를 주도했던 연화는 남한에 온 뒤에도 쿨한 사랑법을 보여준다. 연화는 미적대는 선호에게 “만났으니 됐어요”라고 의젓하게 말하거나 “그 여자 가슴이 만져집디까?”라고 ‘직사포’를 날린다. 선호의 내레이션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며 이야기의 중심에도 선호가 놓여 있지만, <국경의 남쪽>을 연화의 시점에서 읽어도 무방한 것은 둘의 관계를 이끄는 것이 연화이기 때문이다. 반면, 선호는 소심할 뿐 아니라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지금 와서 보니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음표로 가득 찬 악보와도 같아서 제가 할 일은 그저 더듬더듬 연주하는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다. 이 작품을 남성적 판타지가 내재된 선호의 성장영화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다음 말은 선호의 독백에 대한 성숙한 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브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좀더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인물과 대사 위주의 단조로운 구성은 방송사 PD 출신 안판석 감독이 대형 스크린에 적합한 영상 화술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며, 반복되는 플래시백 또한 감정몰입을 막는 지나친 친절로 느껴진다. 하지만 소박한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국경의 남쪽>은 세련되거나 섬세하진 않을지언정 성실하고 정직한 연출의 미덕을 오랜만에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놀이공원, 옥류관, 보통강 유원지 등 평양 시내를 재현한 실감나는 미술, CG 작업과 배우들의 집중력있는 연기 또한 영화에 무게를 싣는다. 특히 이 영화를 통해 연기자로 ‘발견’된 조이진의 활약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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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2006, South Of The Border)
제작사 : 싸이더스FNH / 배급사 : CJ 엔터테인먼트
공식홈페이지 : http://www.southofthebor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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